분열된 집안 - 펄 벅(혜원출판사) ●●●●●◐○○○○
"전에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이젠 나도 전처럼 구식이 아니다.
위안아, 난 요즘 젊은이들이 어떤지를 잘 안단 말이야...."
농부를 친구로 갖게 되고, 일할 수 있는 밭을 얻게 되어 위안은 참으로 기뻤다. 그해 봄 동안 들판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몰랐던 어떤 만족감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위안은 옷도 아예 농부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구두도 벗어버리고 짚신으로 갈아 신었다. (중략) 위안은 그 집에 들에서 입는 자신의 옷을 벗어두고 다녔다. 그리하여 위안은 들에 나오기만 하면 금방 농부로 변했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토지에 애착이 생겼다.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기분이 좋았으며, 거기에는 시가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한 편의 시로 표현해 보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끝내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것에 관해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한 편을 쓰기도 했다. 위안은 농사 그 자체를 사랑했으며 자기 일이 끝나면 그 농부의 밭에 가서 일을 도와주곤 했다. 날씨가 따뜻해져 농부의 아내는 마당에 밥상을 차려 놓곤 했는데 위안은 농부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들 사이에 끼어서 식사도 했다. 날이 갈수록 그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건강한 갈색으로 변했다.
- 합본판 2권, p. 251.
. 대지 3부작의 마지막 소설인 '분열된 집안'은 전편인 '아들들'에서 왕 후가 평생 일궈온 자신의 꿈이 허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 그 지점부터 그의 아들인 왕 위안의 시점으로 바뀌어 시작된다. 시대에 뒤쳐진 시골의 소군벌일 뿐인 아버지를 동정하면서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왕 위안은 고민 끝에 결국 아버지를 떠난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아버지 이전,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은 할아버지 왕 룽이 살았던 '대지'의 삶이었다. 아버지와 동지들의 추적을 피해 할아버지가 처음 살던 토막집으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어렸을 적에 막연하게 동경하던 흙과 자연을 실제로 접한다. 작고 투박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논과 밭, 그 너머로 무한히 펼쳐져 있는 대지. 그렇게 짧았던 토막집 생활은 왕 위안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후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는 사방의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푸른 하늘과 대지가 맞닿는 곳까지 한눈에 들어왔고 대지 위의 조그만 숲으로 싸인 촌락들이 점점이 보였다. 멀리 서쪽에는 청자색 하늘에 톱날같이 솟은 검은 성벽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매일 마음이 내키는대로 걷거나 혹은 말을 타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조국이라는 것의 의미를 비로소 알 듯했다. 이 밭들이며 하늘과 땅, 그리고 나무는 없을망정 보기 좋은 산들, 바로 이것들이 자신의 조국이었던 것이다.
- 합본판 2권, p. 184.
. 그렇게 군벌의 아들이 아니라 흙 속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왕 위안은 배움을 위해 큰아버지 일가와 그의 배다른 여동생이 있는 항구도시로 가게 되고, 그전까지 그가 살고 있던 지방의 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도시의 근대적인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왕 룽의 첫째 아들 왕 따(....)는 전작에서 사치와 허영만 부리다 근면하고 계산에 밝은 둘째 왕 싼에게 땅을 헐값에 넘기고 항구도시로 옮겨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오면 왕 따와 그의 가족들은 번화한 도시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세련된 생활을 한껏 누리게 되고, 그와 반대로 왕 싼과 그의 가족들은 돈만 많을 뿐 지방의 졸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다 민중봉기의 시대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부분들은 펄 벅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당시 중국 사회의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 여담이지만, 사실 대지 3부작은 중국 근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역사에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읽다보면 시기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대지에서 대기근에 시달리던 왕 룽이 기차를 타고 강남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기차를 탄 걸 보면 아무리 봐도 19세기 말일테고, 그 즈음 태어난 왕 후가 분열된 집안의 마지막에서 노쇠해 죽는 3부작의 마지막 시점은 못해도 20세기 중반은 되어야한다. 하지만 분열된 집안의 끄트머리에서 이제 막 혁명정부가 들어선 걸 보면 아무리 늦춰 잡아도 1920년대인 거고, 결국 20세기 초반이 길게 늘려져 있는 것이다. 차라리 철도를 등장시키지 말고 1편의 배경을 아편전쟁이 끝난 1850-60년대 정도로 잡았다면 어느 정도 배경이 맞았겠지만, 애초에 펄 벅은 역사소설이 아니라 변화해가는 중국의 모습과 그 속에서 함께 변화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쓰려 했기에 그런 점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소설의 중국은 실제처럼 느껴지지만 실제와는 다른, 꽤 색다른 공간이다. :)
.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 위안은 항구도시에서의 생활을 통해 본격적으로 개화와 서양문물을 접하고 곧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보통 이정도 전개라면 그곳에서 낙후된 중국의 현실을 깨닫고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을 계몽하기 위해 힘쓰는 이야기가 되어야겠지만, 펄 벅은 그런 류의 소설들과는 달리 자신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채 남아있길 원했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위안은 긴 미국생활을 경험하고 많은 지식을 흡수하면서도 서양의 체제와 사상,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 간에는 근본적으로 넘기 힘든 벽이 있음을 느끼고, 결정적으로 미국에도 역시 빈곤과 차별이 있다는 걸 목격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농부들 틈에 섞여 그가 배운 지식과 농부들이 오랜 시간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를 아우르는 것으로 위안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말이 옳습니다. 책에는 그런 것이 씌어 있지 않습니다. 선생님으로 모실테니 좀 가르쳐 주시겠소?"
- 합본판 2권, p. 249.
. 종종 대지 3부작을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오리엔탈리즘 소설이라고 평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펄 벅은 중국에서 태어나 학생시절 5년 정도를 제외하면 성장기와 젊은 시절을 모두 중국에서 살았던 작가였다. 거기다 그녀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국제정세가 불안해진 중년 이후의 일이었기에 대지 3부작을 쓰던 시점에선 중국에 훨씬 애착을 느끼는 상황이었고. 그랬기에 그녀는 서양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로 인해 비판을 받아 선교사 자격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중국을 옹호하며 중국인이 계속 중국인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대지 3부작은 그런 그녀의 진심이 담긴 역작이었으며, 결국 그런 그녀의 진심이 서양사회에도 받아들여졌던 게 1938년의 노벨문학상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지.
왕 후는 정말 중병 환자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묵한 눈으로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목쉰 음성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천천히 말했다.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놈들을 너 때문에 백칠십삼 명이나 살려 준 일이 있다." 왕후는 버릇처럼 그의 수염을 쓰다듬으려 했으나 그 손이 여느 때처럼 올라가지 않아서 그만 내려뜨리고 시선만 아들을 향하고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너 때문에 그놈들을 죽이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위안은 말했다. 173명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도 기뻤지만 그것보다도 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는 아버지의 그 자상한 마음씨가 한없이 고마웠다.
"전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 나도 그걸 잘 안다. 너는 옛날부터 워낙 기질이 얌전한 아이였거든."
왕 후는 맥없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화롯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합본판 2권, p. 194.
"얘, 위안아, 넌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해라. 난 아직 늙지 않았어. 너무 게을렀지. 내 한 번 더 군대를 모아서 싸우련다. 그래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그 비적 두목이 빼앗아간 세금을 되찾겠다. 전에도 그놈을 무찌른 일이 있으니까, 이번에도 다시 무찌를 수 있어. 그러면 너는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나와 같이 여기서 살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렇지, 그리고 네 마음에 맞는 여자와 결혼도 해라. 전에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이젠 나도 전처럼 구식이 아니다. 위안아, 난 요즘 젊은이들이 어떤지를 잘 안단 말이야...."
- 합본판 2권, p.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