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달걀을 세우기 쉬운 평평하고 튼튼한 테이블을 갖고 있는 사람이랑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요.
. 그전에 번역되었던 가노 도모코의 추리소설에도 많든 적든 어느 정도 로맨스가 섞여있었지만, 이 작품에 이르면 아예 로맨스가 주가 되고 거기에 추리가 살짝 끼어드는 식이다. '추리를 빙자한 연애물'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 가노 도모코는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쌍의 남녀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그들이 만날 때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던 추억이나 일상에서 겪은 작은 수수께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 때마다 둘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가게 된다.
. 큰 줄거리가 로맨스이긴 하지만 각각의 단편에서는 작가가 공들여서 짜놓은 수수께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차피 일상물이니 미스테리도 소소하겠거니 생각했다간 바로 뒤통수를 맞기 딱 좋게 구성되어 있다. :) 특히 두 번째 단편인 '벚꽃 달밤'을 추천. 전형적인 후더닛(범인 - 일상물이니 '정체' 정도로 해두자) 물이긴 하지만 그냥 죽죽 읽어나가다간 작가가 위트있게 내놓은 문제에 '응? 도대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하며 벙찔 수 있으니 유의하자. 네 번째 이야기인 '불가능한 이야기'도 단순히 감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꼼꼼하게 '어떻게'를 채워나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지 않을까. :)
. 전에 리뷰했던 '유리기린'이나 앨리스 시리즈에선 순박하고 착한 마음씨만이 장점일 것 같았던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꽤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외모는 그냥 무던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은근 호감형인(^^;) 듯하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추리력과 깐깐한 관찰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 거기에 약간은 서툰 면이 있는 게 귀여운 부분이고. 가노 도모코의 여주인공이야 언제나 매력적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여기에 미청년 분위기가 나는 어른스러운 여자 바텐더와 뭐든지 한 수 위인 것 같은 노신사까지 그 전의 소설들에선 볼 수 없는 조연 캐릭터들이 대거 나오는 것도 이 소설의 매력이다.
. 사실 일상미스테리라고는 해도 뉴스채널을 틀면 언제든지 범죄사건을 접할 수 있고 낮이건 밤이건 경찰서가 미어터지는 세상에서 일상과 비일상을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걸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서 한 번 가본(운전면허증 발급은 예외로 해두자^^;) 경험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가노 도모코의 '일상' 역시도 이쪽에 속해있고. 생각없는 사람이나 심술궂은 사람 정도는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과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훈훈한 세상. 가노 도모코는 이런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 전달하려 하고, 그런 그녀의 글은 악의가 난무하는 다른 추리소설들과 달리 읽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이미 어떤 내용인지를 다 알고 있는데도, 때때로 다시금 책장을 넘기게 된다.
"게이스케 씨 같으면 알겠죠? 달걀은 원래부터 멀쩡하게 설 수 있는 형태라는 걸."
"네, 해본 적 있습니다. 집중력 훈련이 되거든요. 요는 끈기죠." (중략)
"집중력에 끈기라. 둘 다 귀찮은데요. 게이스케 씨, 달걀을 세우려고 열심히 애쓰는 게 인생이란 생각 안 들어요? 개중엔 겨우 한 개 갖고 애먹는 사람도 있고, 혼자 다섯 개, 여섯 개씩 세우는 사람도 있어요."
"재능을 타고 났다는 말인가요?"
"그러네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세상은 원래 꽤 불공평하니까요. 처음부터 달걀을 세우기 쉬운 평평하고 튼튼한 테이블을 갖고 있는 사람이랑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요. 핸디캡 레이스에서 약한 말이 더 무거운 중량을 달고 뛰는 일도 부지기수예요. 그러니까...."
이즈미 씨는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잔을 놓았다.
"아무리 애써도, 몇 번을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은 한 번 에그 스탠드에 달걀을 맡겨보라고, 그런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에요. 제법 괜찮죠?"
- p. 232. 에그스탠드
p.s. 달걀을 세우는 다른 팁 하나. 소금을 적당히 뿌려 낮은 산을 만들고, 가운데에 달걀을 깊숙이 꽂고, 조심스럽게 소금만 후후 불어내면 달걀만이 그대로 남는다. 글과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냥 생각이 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