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민음사) ●●●●●●◐○○○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뽑아설랑은, 가발을 만들려고 했던거지."
.
.
"그렇다면, 내가 좀 벗겨 먹어도 원망할 건 없겠군.
나도 그렇게 안 하면 굶어 죽을 테니까 말이야."
오위는 마죽을 먹고 있는 여우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의 자신을 그립게 마음 속에 되새겼다. 그것은 많은 사무라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교토의 꼬맹이들에게서조차 "뭐야, 이 딸기코 녀석이." 하는 소리를 듣던 자신이었다. 색 바랜 스이칸에 사시누키를 입고 주인 없는 삽살개처럼 스자쿠 대로를 어슬렁거리는 가엾고도 고독한 자신, 하지만 동시에 또한,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을 오로지 혼자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행복한 자신이었다.
p. 45. 마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꽤 일찍이었던 중학교 시절이었다. 중학교 생일선물로 학원사에서 나온 문학전집을 받았는데, 거기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몇 편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학원사 문학전집은 나름 공들인 하드커버에 2단 구성으로 옛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는데, 하필 그 책에 실려있던 단편들 역시 '라쇼몬', '두자춘', '지옥변' 같은 옛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작가는 이런 고전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인가보다하고 덮었었다.
.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 이번에 민음사 판으로 아쿠타가와 단편선을 읽으면서 실제로는 그의 문학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는 걸 알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년에 쓴 사소설까지 포함하자면 20세기 초 일본에 보급된 모든 소설장르를 가리지 않고 한 번씩은 시도해보았다고 얘기해도 될 정도다. 그 중에서 단 열네편만 실려있는 이 단편집만 해도 어렸을 때 읽었던 옛스러운 이야기에, '코'나 '마죽'처럼 고골리의 단편들을 현지 느낌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나, 심지어는 '덤불 숲'처럼 추리소설에 가까운 작품까지도 수록되어 있다.
. 특히 '묘한 이야기'나 '다네코의 우울'처럼 옛 시대가 아니라 작가가 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시대 특유의 '모던함'을 갖추고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고 아쿠타가와가 이런 소재를, 이렇게 세련되게 쓸 수 있는 작가였구나 감탄하며 읽었다. 그 중에서도 빨간 모자를 쓰고 눈도 코도 입고 흐릿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이유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묘한 이야기'는 딱 8쪽짜리 단편임에도 빨간모자남의 정체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하는 묘한 뒷맛과 아슬아슬한 감각이 길게 남아서 두고두고 곱씹어보게 된다.
다네코는 마침내 혼자가 되자, 그날도 화로 앞에 앉아, 주전자에서 잔에 따라두었던 미지근한 차를 마시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안정을 안고 있었다. 그녀 앞에 있던 신문은 한창 꽃이 만발한 우에노의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이 사진을 보면서 한 번 더 차를 마시려 했다. 그런데 차에는 어느새 운모처럼 생긴 기름기가 떠 있었다. 게다가 기분이 그래서인지, 그것은 그녀의 눈썹과 똑같았다.
"...."
다네코는 턱을 받친 채, 머리 빗을 기운도 없어 그저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p. 72. 다네코의 우울
. 이렇듯 아쿠다가와는 19세기 초반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시작되어 당시 문단을 장악하고 있던 사소설에 끌려가지 않고, 과연 무엇을 써야할 지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이런 다채로운 작품들이고. 그래서 그의 다양한 중단편들을 읽고 있자면, 길을 찾아 해매던 그의 고민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