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지나 5천 그루의 벚꽃을 피워내는 서사

리오우 - 다카무라 가오루 (손안의책) ●●●●●●●●●○

by 눈시울


5월, 넌장 강 강변에는 5천 그루의 벚나무에서 꽃이 피었다.



그렇게 찾아온 모리야마 공장은 벌써 환갑이라는 모리야마 고조도 포함해서, 분명히 자신의 고향이라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가령, 좀 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아도, 여섯 살의 인생이 환희에서 시작되어 절망으로 닫힌 것과도 같은 이 공장에서, 스물 두 살의 인생이 다시 환희로 시작된다는 것은 꽤 나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 p. 221.




.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는 고갯길의 내리막에 막 접어들즈음, 빛 속에서 리오우는 가즈아키에게 헤이룽장 성에 백만 헥타르 넓이의 땅을 마련하고 그 땅 남쪽 넌장 강의 습지에 5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너를 대륙에 맞이하겠다고 말했다. 백만 헥타르라는 말 자체는 그저 큰 숫자로 다가올 뿐이었지만, 강을 따라 피어나는 5천 그루의 벚나무라니. 500페이지 내내 독자를 도시 뒷골목의 좁은 길에서 헤매게 하고 톱니바위와 나사 하나에 몰두하게 하던 다카무라 가오루는 그 끝이 숨이 막힐 정도의 정경 속에서 해후하는 두 남자의 모습임을 예고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조시'에서도 그랬듯, 공장과 그 근처 주택단지를 그려내는 다카무라 가오루의 솜씨는 이번에도 일품이다.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보편화되면서 이제 주거지와 공장단지가 뒤섞인 동네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지만, 내가 아직 어렸던 시절만 해도 (그게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6동짜리 낡은 아파트였던 우리 집 근처에 화학이었는지 섬유였는지 공장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다카무라 가오루가 그려내는 풍경이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우리와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가즈아키는 어린 시절에 금속공장 옆의 2층짜리 목조 아파트에 살면서 공장에 드나들고, 작가는 공장이 마치 가즈아키의 숙명이라도 되는 양 바싹 밀착해서 프레이즈반이니, 터릿 선반이니, 보링머신이니 하는 생소한 기계와 부품들의 이름을 줄줄 읊어댄다. 그러고보면 '마크스의 산'에도, '황금을 갖고 튀어라'에도 이런 환경에 거주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작가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연초부터 혼자 3천 개를 깎아 온 것은, 최고급 비디오테이프레코더에 사용하는 특수한 회전 드럼 스핀들이라는 극소축받이의 외륜인데, 절삭장치가 달린 고속선반이 자동으로 축 2밀리미터의 궤도홈을 깎아 간다. 그 후 하나하나를 연삭반에 걸고, 홈을 1,000분의 1밀리미터의 정밀도까지 깎는 것이 수작업인데, 가즈아키는 그날 밤 안에 반제품 중 나머지 200개 절삭을 먼저 끝낼 생각이었다. (중략) 선반이 거의 10초 만에 한 개를 깎아냄과 동시에 정지하면, 가즈아키는 그것을 즉시 척에서 내리고 다시 새로운 공작물을 물려 스위치에 넣기만 하면 되는 단순작업이었다. 가즈아키는 기계 옆에서 안개처럼 흩어지는 절삭기름을 뒤집어쓰고, 회전하는 모터의 가느다란 금속성 소리를 뒤집어쓰면서, 10년간이나 심신에 스며든 그 냄새며 진동이며 소리에 둘러싸여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일체의 잡념을 잊었다.

- p. 571~2.


. 다른 작품들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다카무라 가오루의 힘은 '이야기' 그 자체에 있다. 그것이 몇십년에 걸친 길고 긴 이야기이든, 혹은 며칠 사이에 일어나는 짧은 이야기이든 그녀는 언제나 꾸준하게, 같은 밀도로 글을 써나간다. '시대' 혹은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 함몰되어 막상 중심이 되어야 할 이야기가 생동감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고, 그 시대를 실제 살아나가는 인간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춰서, 그 등장인물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건에 집중한다. 역사는 그 사건 너머로 희미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거역할 수 없는 동력으로 작용하며 이야기를 과거에서 현재로 이끌어오고 다시 미래로 이끌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그렇게 속설 속에서 시대는 길디 길었던 냉전과 문혁의 시대를 거쳐, 천안문 사건과 베를린 장벽, 데탕트와 중국의 개방에 이르기까지 장대하게 흘러 우리에게도 익숙한 1990년대로 넘어오고, 뒷골목의 종업원과 킬러 역시 그 시간을 살아낸 끝에 각각 한 아이의 아버지와 거대한 땅의 '영주'가 되어 약속한 땅에서 다시 만난다. 로맹 롤랑이나 토마스 만처럼 인생 그 자체를 그려내는 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득하고 아련한 서사를 다카무라 가오루에게서도 느끼게 된다.


. 다시 감상의 처음으로 돌아와서 - 빛 속에서 리오우가 5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겠다고 가즈아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마치 체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급하게 페이지를 읽어내려갔다. 때로는 함께, 때로는 공장과 뒷골목을 터전으로 떨어져 있던 둘의 마지막 해후는 과연 어떨 것인지. 그렇게 이야기 역시도 그 끝을 향해 정신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마지막에 다다르기 직전, 나는 드라마나 만화의 엔딩신 같은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이야기 동안 억눌려진 감정을 끌어내어 흔드는 그런 장면을. 하지만 가즈아키의 중국 이주, 리오우가 만든 마을의 모습, 둘의 해후를 지나 - 5천 그루의 벚나무가 심겨져 있는 장면 역시도 지나 - 마지막 페이지 뒤로 책의 파란 속지가 비쳐보일 때까지도 작가는 그저 묵묵히, 너무도 담담해서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한 번도 소리 높이지 않고 묵묵히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을 때, 마을에서 가즈아키와 함께 봄을 맞은 리오우가 넌장 강에 피어난 벚꽃 사이에서 춤추는 짤막한 마지막 장면을 읽고 나니 뭔가 묵직한 것이 마음 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가쁘지도 않은 숨을 토해냈다.



. 5월, 넌장 강 강변에는 5천 그루의 벚나무에서 꽃이 피었다. 리오우는 꽃의 요기에 이끌린 듯이, 옛날과 똑같이 가성으로 '홍후, 스이야아, 랑야미, 랑타, 랑아' 하고 노래했다. 얇은 천을 파도처럼 흔들면서, 온몸을 봄의 기쁨으로 떨고, 그 손가락과 팔과 다리로 대지와 천공의 모든 빛을 끌어안듯이 춤추었다.

- p.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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