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현재의 뜻을 이루고 나면 바로 반동이 찾아와 오히려 뜻을 이룬 일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지는 경우가 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그것과 약간 비슷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붉은 담요가 나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두르고 있는 붉은 담요만 빼면 이 젊은 사내는 마음속까지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실하게 재미없다고 느꼈다. 게다가 재미없는 일이 한 가지 더 겹쳤다. 조조 씨가 밉살스러울 정도로 공평해서 내가 붉은 담요보다 갱부에 적합하다는 점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완전히 기계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순번이 앞서니까 좀 더 내 편을 들어주어도 좋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p. 89.
. '마음'이나 '그 후'처럼 섬세하게 감정선을 그려내는 것도 아니고, '산시로'나 '문'처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도련님'처럼 한바탕의 활극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시시해보이는) 연애 사건에 휘말려 골치아파하다가 이것저것 다 귀찮다고 홀로 도피한 우유부단하고 무력한 학생이 우연히 만난 야바위꾼의 권유에 광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되지 못하는 이야기다.
. 물론 나름 학생인 주인공이니 뭔가 생각은 있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실제 읽어보면 뭔가 대단한 성찰이나 사유가 있다기보다는, 스스로도 이야기하듯 치기어리고 허영심 가득한 투덜거림에 가깝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메이지식 중2병이라고나 할까. 기적까지는 아니라 해도 충분히 행운이라 할 만한 만남과 그런 곳에서 들을 법하지 않은 소중한 조언 앞에서도 고집을 부리고,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얄팍한 지식(이래봐야 산골 노파도 하던 일을 하는 수준이다)을 가지고 연명하다가 별다른 계기 없이 그만두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별 게 없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오히려 소세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더 확실히 전해진다. 주인공인 '나'는 책 속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나'라는 것을. 다른 작품들처럼 방황하는 청춘도 아니고, 인생을 건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세상에 맞서서 호쾌한 활극을 벌이는 것도 아닌. 하다못해 말끝마다 '이 몸'을 붙이고 다니는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그래서 이야기의 끝까지 주인공에겐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 한순간에 내 바람이 이루어져 나는 일단 산속 사람이 되었다. 그때 "그렇지만 아주 힘들거요" 라는 하라 씨의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현재의 뜻을 이루고 나면 바로 반등이 찾아와 오히려 뜻을 이룬 일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지는 경우가 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그것과 약간 비슷했다.
- p. 161.
. 스스로는 내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한꺼풀 벗겨내고 보면 유치한 광고와 홍보에 넘어가 스스로 납득해버린 채로 그저 떠밀려가듯 살아가고, 그 와중에도 뭐 하나 할때마다 일일이 허영기 가득한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성이 차질 않는다. 그러기에 책을 읽을 때는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정작 읽고 나면 뼈가 시리는 이 경험담은 메이지 시대의 한심스러운 한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를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지금에도 유효한 이야기로 남는다.
그는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물론 그때그때의 감상 같은 것은있지만, 별로 진지한 것은 아닙니다. (중략) 그리고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광산에 들어갔을 때와 거의 같은 상태로 밖으로 나옵니다. 즉 그에게는 스스로 판단했다든가, 선택했다든가, 그런 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고 할까, 무척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인간이란 건 실제로는 그렇게 쉽게 자기 힘으로 자기 힘으로 사물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