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바리케이드가 쌓이자마자 바로 그 순간부터 온건자유주의자들은 모두(그리고 카부르가 말한 것처럼 급진주의자들의 상당수도) 잠재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온건파가 그 입장을 급속히 혹은 차츰차츰 바꾸어감에 따라, 혹은 대열에서 이탈해나감에 따라 노동자들, 즉 민주적 급진파 중 비타협 분자들은 고립되었다. 아니면 전에는 온건파였다가 지금은 보수적이 된 세력과 구체제의 연합, 즉 프랑스 사람들의 이른바 '질서당'의 출현이라고 하는 훨씬 더 치명적인 사태에 직면하게도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 p. 96. 여러 국민들의 봄
. '이들 혁명은 모두가 일단은 성공했으나 재빨리,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실패로 돌아갔다'며 에릭 홉스봄은 1848년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작 '혁명의 시대'에서 1840년대의 불황을 계기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던 1848년의 혁명은 부르주아를 축으로 한 '질서'파의 반대에 부딪혀 끝을 맺었다. 18세기 말 "혁명의 시대"를 주도했던 부르주아들은 50년 후의 혁명에서는 반대편에 서서 혁명을 무산시켰고, 그 자리에는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질서'파들이 구체제와 급진파 일부를 끌어들여 형성한 사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회가 세계 전역을 석권했던 25년간을,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 질서가 혁명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마치 혁명의 종식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급격하게 터져나온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 자체가 도약하는 것 같았던 시기. 그렇게 '자본'은 아직 자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신세계를 향해 미친듯이 확장해갔고, 내부적으로는 화려한 발전상을 보여주고 어느 정도 과실을 나누며 내부의 불만세력을 차례로 편입시켜 나간다. 그들의 세련되고 기술적인 통치 앞에서는 급진적인 사상도, 1인 1표제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 정치 뿐만이 아니었다. 자본이 가진 막대한 금권으로 문화와 예술 역시 빠르게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혁명이 사망선고를 받은 이후에는 급진적인 사상과 이념들까지도 살롱의 교양과 안주거리로 소모된다. 이 시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본에게 대항할 수 있었을 종교 역시도 자본주의 논리를 옹호하는 쪽으로 편입되거나, 자본과의 타협을 거부한 경우에는 비과학적이고 고루하다는 몰이를 당하며 고립되고 말았다.
. 그렇게 자본은 어떠한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채 확고하게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자유와 발전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채 미친듯이 질주하며 세계를 자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던 25년. 그러나 온 세계가 자본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이후에도 자본은 그 질주를 멈출 수 없었고, 결국 그 질주는 다른 자본의 영역을 침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 제국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현실적으로 그들이 한 정치 시스템 안에서 힘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사람 머릿수, 즉 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비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서 이것을 빼앗아버리면, 1860년대 말에 스웨덴에서 실제로 그러했듯이, 그리고 후일 진정한 대중정치가 대두하게 되었을 때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되었듯이, 부르주아지는 적어도 한 나라의 정치에서는 선거에서 맥을 못 추는 무력한 소수파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에게는 소부르아지와 노동계급, 그리고 더욱 드물게는 농민의 지지를 유지하는 일, 또한 적어도 그러한 계층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