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마, 우리는 너를 그렇게 불렀다. 네가 본명을 듣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너에게 나는 갤럭시였고 나에게 너는 델마였다. 너는 본명도 알려주었지만, 나는 나중에는 네 진짜 이름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자주 머물던 곳에는 너는 늘 델마였다. 네 가족들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리가 얼굴조차 모른 채 5년을 보낸 사이여서 그럴 수도 있었고 네게 델마를 만들어 준 사람이 나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오히려 반갑다.
너와 처음 만난 곳은 음지식물 동호회였다. 식물 중에서도 오로지 음지식물만을 키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는 음지식물에 대한 이야기보다 음지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음지식물은 이를테면 일종의 비밀번호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조용히 볕이 없는 곳에 모였고 혼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했다. 나도 델마, 너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너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5년 동안 우리는 카페 쪽지로만 대화를 나누었다. 개인 연락처도 받지 않았고 서로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음지식물 동호회가 사라진다면 너와 나의 연결도 완전히 끊어지게 되는 것이었는데,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정하게 5년을 보냈다. 동호회 쪽지를 통해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나보다 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을 꼽으라면 네가 유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보다 너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너라면 이 유서를 받고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너에게만 유서를 남긴다. 너는 이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것임을 안다. 델마, 나는 삶이 지독하게 오래 이어진다는 걸 더는 버틸 수 없다. 음지식물처럼 조용히 느리게 살아보려고 했으나 무용했다.
나는 스킨답서스를 키웠다. 음지식물이라고 해도 완전히 햇볕 없이 키우는 게 아니다. 가끔은 일광욕을 시켜주어야 했고, 인공조명을 쬐어주어야 했다. 스킨답서스를 꺼내 햇볕 아래 두면서 매일 잎의 색깔을 관찰했다. 내가 키우는 스킨답서스에는 흰 줄무늬가 있었다. 햇볕에 오래 두면 잎 끝부터 갈색으로 죽어갔다. 줄무늬도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았다. 이파리가 기운을 잃고 축 늘어져 갔다.
나는 몇 번 너에게 스킨답서스가 계속 죽어간다고 이야기 했다. 이제 너도 진실을 알게 됐으리라. 나는 일부러 스킨답서스 화분을 죽이고 있었다. 방치하거나 물을 주지 않는 방식이 아니라, 음지식물을 햇볕에 오래 노출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킨답서스는 햇볕을 받으며 꾸준히 조금씩 병들었다. 마치 스킨답서스를 일부러 죽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걸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눈금이 있는 잔에 물을 담아 계산하며 주었고 영양제를 꽂아주었다. 그리고 오래, 아주 오래 햇볕 아래에 두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준 물도, 영양제도 소용없게 된다. 스킨답서스의 잎이 끝부터 조금씩 말려들어갈 때 나는 사진을 찍어 너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 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너는 진지하게 흙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물론 나는 최고급 분토를 쓰고 있었다. 이 흙은 늘 약간 촉촉했고 새카맸다. 그러므로 스킨답서스가 아닌 다른 음지식물들은 내 집에서 무성하게 자라났다.
집에는 아예 식물을 기르는 방이 따로 있었다. 그곳의 인공조명은 따뜻하고 짙은 색이었다. 마치 진짜 햇볕처럼 말이다.
나의 삶도 이 스킨답서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단 1시간조차 10년처럼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조금씩 병들어갔다. 누군가 지나치게 오래 나를 삶에 노출시킨 것 같았다. 이따금은 정말로 피부가 따끔따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도 알겠다시피 정신과 의사는 내게 조현 양성 장애가 있는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나는 가족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피부가 따끔거릴 때면 핸드폰을 켜고 너에게 쪽지를 보냈다. 델마, 스킨답서스가 죽어가. 이 화분만 자꾸 그래. 그러면 네가 흙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스킨답서스 화분을, 이미 꽤 작아진 그것을 끌고 와 햇볕에 내어 놓는다.
이 스킨답서스는 사실 음지식물 동호회에서 받아온 것이다. 나에게 화분을 준 사람은 동호회를 탈퇴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음지 인간들을 더는 견딜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양지식물을 키우게 될까 궁금했다. 양지식물 동호회에 그 사람의 자리가 있을까. 나는 스킨답서스를 죽이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하고 받아왔다. 처음에 받은 스킨답서스는 무겁고 큰 화분에 담겨있었는데 몇 번의 분갈이와 햇볕에 내놓는 학대를 통해 이제는 작은 화분으로 옮겨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스킨답서스를 네게 남겨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테다. 네게 나를 추모할 물건이 필요할 리 없다.
우리는 5년 만에 첫 만남을 가졌다. 델마, 너는 생각보다 더 못생겼고 조용했다. 외모는 네 콤플렉스 중 하나여서 너는 자주 너를 만나면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나는 부유하고 아름다웠으므로 네 고민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렇게 1년, 2년, 3년, 4년, 5년을 약속하고서야 너를 볼 수 있었다.
델마, 내가 어떻게 너에게 실망할 수 있을까. 나는 네가 설령 문둥병 환자였더라도 상관없었다. 이것에 관해 여러 번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사랑일까? 그러나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면 혹시 나에게 너는 그 스킨답서스가 아니었는지. 나는 조금씩 너를 양지로 꼬여 타죽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는지. 사랑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죽이기 위해 애쓰지 않았는지.
나는 삶 자체를 견딜 수 없다. 얕은 웅덩이에 고여 썩는 물, 바람도 불지 않는 마른 골짜기,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내가 삶을 생각할 때 전해 받는 이미지는 이런 것들이다.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돌이킬 수 있는 순간들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있었다. 아주 많은 전환점들이 있었다.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더 많았던 것도 같다. 내 삶에는 기회가 늘 있었다. 내가 제 때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삶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지점들이었다. 사실 몇몇 모퉁이를 돌며 나는 실제로 변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런 순간들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아름답다. 나는 당당해질 수 있었고 세상을 모두 이해한 것처럼 여겼다. 삶이 숨겨 둔 진리들을 깨우친 것 같았다. 삶이 스튜디오라면 나는 입구를 발견한 사람인 듯 느껴졌다. 한 번에 인사를 세 번이나 하는 사람처럼,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나잇.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나 다시 무기력해 졌다. 온 세상이 깊은 계곡으로 웅크리고 숨어 나 홀로 남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주치의는 내게 많은 조현 양상 환자들이 ‘삶을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을 발현 전에 느낀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내 긍정적인 변화가 종국에는 조현 양상 장애를 불러오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렇지만 모퉁이를 돌았던 순간이 후회된 적은 없다. 병을 가지게 됐더라도 나는 그 순간들을 사랑한다. 유서를 쓰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 순간들에는 그만한 가치가, 죽음을 불사할 가치가 있었다.
내 친구들에게는 우울과 외로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하면 그들은 나를 위로할 것이고 나는 일단은 조금 괜찮아질 테다. 나는 남의 위로에 쉽게 나아지는 사람이었다. 너는 아니었다. 너는 타인의 위로를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내 위로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나를 실제로 만난 후 너는 내 말을 점점 더 경시하기 시작했다. 나와 네가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음지 인간이다. 햇볕은 우리를 태워 죽인다. 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것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친구들의 말에 얼마나 위안을 받든, 잠시 행복한 기간이 길든 짧든, 내가 아름답고 부유하든 아니든 나는 결국 다시 이곳이 양지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때는 수천 배의 좌절을 느낄 것이다. 희망을 한 번 본 자의 절망은 훨씬 깊기 마련이다. 음지에서 밖에 살 수 없는 내게 이 삶은 그 자체가 사형 선고와 같다.
음지식물 동호회를 떠나 양지식물 동호회로 옮긴 그 사람은 볕 아래서도 피부가 따끔거리지 않을까? 항상 이것이 궁금했다.
나는 차라리 혼자서 앓는 게 편했다. 오로지 너만이 내 병을 알고 있었다. 델마, 이것은 유서지만 연서기도 하다. 스킨답서스를 사랑했던 것처럼 너를 사랑한다. 아름다운 잎이 조금씩 갈색으로 쪼글쪼글해지고 흰 무늬가 흐려지는 과정을 사랑했다. 양지 아래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스킨답서스는 너뿐만이 아니라 피부가 따끔거려 이제 반팔을 입을 수 없는 나와도 닮았다.
우리의 만남은 한여름에 이루어졌지만 나는 긴팔을 입고 있었다. 너는 선글라스를 쓰고 나왔다. 선글라스를 벗어보라고 설득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한참 논쟁 끝에 내가 긴팔을 입고 나온 건 피부가 따끔거려서야, 하고 말하자 네가 침묵했다. 너는 아마 비밀은 비밀로 사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내가 이미 채팅으로 몇 번 말 한 병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너도 결국에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델마, 네 눈을 기억한다. 작고 쌍꺼풀이 없는 눈. 델마, 네 코를 기억한다. 납작하고 콧구멍이 큰 코. 델마, 네 얼굴을 기억한다. 누렇고 거칠한 피부와 자잘한 여드름이 있는 턱선, 아름답지 못한 입술. 델마, 네 몸을 기억한다. 바짝 말라 곧 부러질 것 같던 팔과 다리. 너는 심지어 온통 새카만 옷을 입고 나왔다.
나는 그 날 너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네가 선글라스를 벗은 순간, 나의 스킨답서스가 가진 비밀에 대해 말할 뻔했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밀을 들었더라면 너는 분명히 내게 실망했을 테니까. 아마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연서라고 말했으나 너를 연모한 것은 아니다. 너에게 입 맞추고 싶다고 적었으나 너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네 못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다. 음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볕을 주지 못하면 너는 아마 죽어버렸을 것이다. 이제 먼저 죽는 것은 내가 되었으나, 사실 나는 우리가 만난 날 네가 먼저 죽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는 남길 자식이 없다. 마찬가지로 네가 가족과 연락을 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만일 네 어머니나 아버지가 나처럼 너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것은 유서이므로 조금 다르긴 하지만, 너는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네 가족과는 연락을 끊었다기보다 네가 버림받은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5년 간 쪽지를 주고받아서였을까. 네 가족들은 네가 비밀을 가지는 걸 참지 못했다. 너는 비밀이 꽤 많았다. 나조차 너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된 일들이 있었다.
나와 만나는 자리에 너는 반팔을 입고 왔다. 나는 네 팔뚝 위에서 둥그렇게 지져진 상처들을 봤다. 담뱃불로 꾹 누른 것처럼 생긴 상처들이었다. 처음에는 네 가족이 너를 학대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반팔을 입고 나온 이유는 내 병명에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나를 비밀을 털어 놓아도 괜찮은 큰 언니쯤으로 생각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묻기도 전에 네가 먼저 이 자국들은 내가 낸 거예요,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벗은 직후에 말이다.
너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아니다, 많았다. 너는 밥을 자주 굶었다. 밖에 나가지 않고 갑자기 몇 개월씩 집에 은둔하기도 했다. 한 번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잘린 이후에는 일자리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가 날 때, 슬플 때, 감정이 솟구쳐 오를 때면 담배를 피우다가 네 팔뚝을 냅다 지져버렸다. 그 자국들은 네 감정이 왔다갔다한 흔적을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 너는 자국들 하나마다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너희 어머니가 네 외모를 비난했을 때 생긴 자국이고, 저것은 네 아버지가 너를 돈을 벌지 못하는 무능아라고 이야기 했을 때 생긴 자국이다. 너처럼 지독한 음지 인간은 처음이었다. 물론 나도 피부가 따끔거려 계속 팔뚝을 긁고 있었지만.
나는 혈육의 관계가 늘 싫었다. 그것은 내가 끊으려고 애써도 완전히 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경우에 나는 달아나고 싶으면 단지 달리기만 하면 됐다. 돈을 쏟으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아예 문제 자체를 차단했다. 그런 것은 나를 뚫고 지나가지도, 나에게 머무르지도 못한 뻔한 고통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이 얽히면 도망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서로에게 고함을 질러야 했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처음부터 사랑하라고 주어진 존재들이었지만 사랑할 가치가 없는 이들이었다. 누군가 나의 부고를 전하면 그들은 울겠지만 나는 그들의 눈물조차 받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델마, 나는 네가 울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네 눈물은 적어도 아름답다.
여기에는 불이해의 구멍이 사방에 뚫려 있다. 나는 종종 무심코 걷다가도 그런 구멍에 발을 빠트린다. 너는 아예 구멍 속에서 사는 여자인 듯 보인다. 너에게 조언할 것이 있다.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고자 할 때 그것은 노력이나 도전이 아닌 단지 고집이 될 뿐이다. 이루어질 수 있는 일에는 아예 ‘할 수 없는’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다. 오직 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리고 고집 부리지 않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너도 결국에는 구멍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고, 사람들과 이해를 위해 부딪칠 수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사랑을 줄 수도 있다. 너는 평생 사랑할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 했으나 그렇지 않다. 너도 결국에는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자 시도하지조차 않았다. 이 수많은 불이해의 구멍 사이에 오롯이 혼자 있었다.
너를 만났을 때 일부러 내 가정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 날 말을 많이 한 쪽은 너였고, 나는 듣고 있었다. 너는 5년 동안 나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 날 전부 하려는 것 같았다. 아마 우리가 곧 헤어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은 연인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지만, 나는 우리가 그런 단어를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켰을 때 내가 너만큼 사랑했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스스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곧잘 너에게 질리고는 한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멀어지기를 선택한 쪽은 타인이 아니라 너일 것이다. 너는 사람을 밀어내는 일을 잘했다. 음지식물 동호회에서도 너와 친해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의 오랜 침묵을, 느닷없는 슬픔을, 지나친 정적을 견디지 못했다. 똑같은 음지 인간들이었는데도 그랬다.
너는 그냥 인간과는 더욱 섞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에게 노출되면서 너는 나의 스킨답서스처럼 계속 죽어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갑작스럽게 일어나 갑작스럽게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은 느리게 온다. 천천히 단계를 밟는다. 식물이 죽는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뿌리가 끊어지고, 줄무늬가 사라지며 죽어간다. 단번에 죽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도 그렇다. 너는 아주 오래 전에 죽음을 선고 받은 것 같았다. 나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너는 그때에도 꾸준히 죽어오고 있었다. 네가 담뱃불을 팔뚝에 비벼 끄기 전부터, 못생긴 외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전부터 너는 이미 죽는 중이었다. 나는 무엇이 너를 죽였는지 궁금하다. 너를 뚫고 지나가버린, 그래서 너에게 머무르게 되어버린 고통이 궁금하다. 가능하면 너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이제는 알 수 없게 되겠지만.
델마, 나는 항상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내 죽음은 확실하기를 바랐다. 천천히 죽어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단번에 죽고자 했다. 그래서 늘 높은 곳을 찾아 다녔다. 가장 높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도 죽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죽음 역시 오래 전부터 스멀스멀 스며든 것이다. 단번에 죽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죽음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단지 우리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것일까.
어릴 적 집 앞 어린이 회관에는 일정한 속력으로 서로 부딪치는 진자의 추가 있었다. 세 개의 공으로 된 기구였다. 가운데에 있는 공은 움직이지 않았고, 양쪽이 공이 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하게 똑, 딱, 똑, 딱, 움직였다. 그렇게 일정한 박자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죽음에 노출되었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삶의 면면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똑, 다음에는 딱, 이 온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잎이 갈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음지 인간들이 아니다. 볕 아래 오래 두어도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을 양지 인간들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양지 인간들의 삶은 촘촘하게 엮은 실이나 만조의 바다와 같다. 아름답다. 어떤 구멍도 없이 꽉 맞물려 있다.
나의 언니는 17살에 죽었다. 이탈리아에서였다. 혼자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이탈리아 경찰은 언니의 죽음을 사고사로 결정지었다.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상쩍은 부분이 많았다. 경찰은 CCTV를 우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언니의 사고 장소에는 주유소가 있었다. 주유소 주인은 늙은 백인 남자였는데, 우리가 언니의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자, 우리에게 서툰 영어로 주섬주섬 언니가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여자애가 차에서 뛰어 내렸어. 머리를 부딪쳤어. 그 자리에서 죽었어.” 주유소 주인은 언니가 뛰어내린 차가 택시였다고 했다. 그 주유소는 도시의 끄트머리에 있는 곳이었다. 주유소 너머에는 오래된 국도가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 운전사를 찾아다녔다. 그가 언니를 납치했다고 믿은 것이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경찰을 고소하는 사이에 어머니는 언니의 얼굴이 실린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목격자를 찾기 위해 애썼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언니를 보지 않은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주유소 주인은 우리를 돕고 싶어 했지만, 그의 주유소에 있는 CCTV는 구색만 갖추기 위해 붙여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둡거나 흐린 날이면 CCTV는 곧잘 고장 나고는 했다. 언니가 죽은 그 날에도 CCTV에는 흐린 영상만 찍혀 있었다. 그 CCTV 영상은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고 장면을 담은 영상이었다. 어머니는 영상을 계속해서 돌려 봤다. 택시 번호를 알기 위해서였다. 곁에 나를 앉히고 번호가 보이면 적으라고 했다. 나는 흰 공책과 펜을 들고 CCTV 영상을 보았다. 노이즈가 심해서 택시와 도로가 거의 구별가지 않았다. 중간에 택시 같이 보이는 것에서 점 같은 것이 튀어나왔는데, 그것이 언니였다. 그러나 주유소 주인의 말이 없었더라면 누구도 그것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튀어나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나오기 전부터 죽어있던 것 같기도 했다. 주유소 주인의 말이 사실이었을까? 언니는 살아서 택시에서 뛰어내렸을까. 혹시 이미 죽은 언니를 누군가 던진 것은 아닐까.
우리 가족은 이탈리아에서 더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언니를 보았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을 상대로 한 고소는 몇 년을 질질 끌더니 흐지부지 되었다. 그저 유품으로 언니의 배낭을 가져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언니의 배낭 안에는 물러 터진 자두와 다이어리, 카메라가 있었다. 다이어리는 자두의 즙에 흠뻑 젖어 종이가 서로 달라붙었다. 펼쳐서 찾아 읽을 수 있던 문장은 겨우 “오늘은 베니스에 간다. 베니스의 상인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실제로 가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곤돌라를 타고 가장 유명한 다리 아래를 지나가 볼 생각이다. 그러면 다리 사람들이 위에서 손을 흔들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베니스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이것이었다. 이후에 억지로 달라붙은 것을 떼어 읽었지만 사고 전후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언니가 이탈리아에서 적은 마지막 문장은 “이곳은 바닥이 아름답다. 어느 도시든 타일을 예쁘게 깔아 놨다. 바닥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중에 이 여행을 되돌아 볼 때 바닥이 제일 먼저 기억날 거 같다.” 이것이었다.
언니는 이탈리아에 갔고, 무른 자두를 샀고, 바닥의 타일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택시에 탔다.
카메라에는 정말로 바닥 사진이 잔뜩 있었다. 언니는 신발코만 겨우 나와 있었다. 이탈리아의 바닥이 정말 여러 무늬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대부분이 오래 된 돌들로 되어 있었다. 수십 년 전에도 같은 모양으로 있었던 바닥이다.
바닥을 찍지 않은 사진 속에서 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군가 모르는 외국인이 찍어준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의 살아있는 언니는 두 팔을 활짝 벌린 모습이기도 했고, 눈을 감고 있기도 했으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기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카메라의 사진을 전부 인화했다. 그리고 사진 속에 택시는 없는지 샅샅이 뒤졌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많은 바닥을 보았다. 나중에는 바닥만 보아도 도시의 이름을 맞힐 수 있개 됐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사진 속에서도 택시는 없었다.
나는 언니의 유품을 가지게 됐다. 카메라와 겹겹이 달라붙은 다이어리. 처음 몇 개월 동안은 다이어리를 해독하기 위해 애썼다. 자두 즙 사이로 번진 문장 비슷해 보이는 것을 무조건 옮겨 적었다. “여기서 오래 된 성당을 보았다. 정말 예뻤다. 매번 카페에 갈 때마다 너처럼 어린 아이는 혼자 여행을 오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나를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제 여름이 지나고 있어서 밤이면 조금 쌀쌀하다. 카디건을 가져오길 다행이다. 갤럭시가 좋아할만한 기념품도 샀다. 오늘은 게스트 하우스에 동양인이 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 무섭지 않다. 돌아갈 날이 기대되지만 남은 날들도 기대된다.” 나는 이 문장들을 한동안 달달 외우고 다녔다. 부모님에게는 내가 찾은 문장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만의 과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문장을 모조리 해독하면 범인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언니의 살해자를 찾는 운명이라도 타고난 것처럼.
지금은 기억나는 문장이 없다. 언니의 얼굴도 희미하다. 다만 이탈리아의 바닥들은 아직도 기억난다. 물러터진 자두의 시큼한 냄새와 오래된 돌멩이들이 함께 떠오른다. 언니는 왜 택시에서 뛰어 내렸을까? 주유소 주인의 추측처럼 정말 납치당했던 것일까. 사실 이 모든 것은 단지 가정에 불과하다. 그 택시 운전사를 찾았더라도 소용없었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스스로 문을 열고 뛰어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꽤 오래 이 생각에 집착했다. 언니는 실은 죽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바닥 사진을 찍은 것이다. 모노 타일로 유서를 쓴 것이다. 바닥과 바닥 사진 사이에 어떤 암호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갔을 수도 있다. 언니가 가져간 캐리어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택시 트렁크에 캐리어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언니가 베니스의 다리 위에서 캐리어를 떨어뜨리는 상상을 했다. 무거운 캐리어는 물에 첨벙 빠지자마자 가라앉고 언니의 흔적을 잡아먹어 버린다. 언니가 가져간 옷, 여권, 지갑, 핸드폰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어쩌면 언니의 캐리어는 여전히 베니스의 물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짠 바닷물에 젖어 모든 증거가 흐려진 채로. 그렇게 모든 것을 바닷물 속에 집어넣은 다음 언니는 택시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놀라서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내 상상 속에서 택시 운전사는 코가 유난히 큰 이탈리아인이다. 언니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백미러에서 사라진다. 택시 운전사는 무서워서 택시를 멈추지 못한다. 그렇게 작은 동양인 아이였다면 반드시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대로 도망쳐버린다. 주유소의 CCTV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언니는 이탈리아에서 죽는다. 새들은 서쪽에서 죽는 것처럼, 누군가는 얼지 않고 죽지 않고 부활하는 것처럼, 황야에 부름을 받아 떠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델마, 너는 아마 언니가 17살에 이탈리아에 갈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부럽다고 말할 것이다. 너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17살의 너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너는 그것이 외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죽음은 그 무렵부터 네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걸까. 한 번은 걸레 빤 물을 뒤집어 쓴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 구정물이 몹시 짰다고 했다. 바닷물처럼 짜고 썼다고.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 중에 누군가 발로 문을 차 열어버린 적도 있었다고 했다. 화장실에 꽉 차있던 여자애들이 네가 오줌 누는 모습을 보았고 너는 그때 그만 일어서버렸다고, 그래서 허벅지가 다 젖어버렸다고.
나는 네가 내 언니를 질투하게 될 것임을 안다. 언니는 나처럼 외모가 아름다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언니의 눈이, 코가, 입술이 예쁘다고 말했다. 언니에게 그런 칭찬은 당연한 것이어서 나중에는 누군가 그런 말을 해도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고 끝이었다. 너는 17살이라는 나이에 죽은 것 역시 부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벌써 그 나이까지 살아버렸다는 생각에 울었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인이 되었을 때도 나는 높은 옥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딘가에는 뛰어내릴 만한 옥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인정해야겠다. 죽음은 내 곁에서도 오래 맴돌고 있었다.
너에게 남길 것은 없다. 나는 언니의 유품을 작은 상자에 담아 넣어두었다. 유품도 처음에만 소중할 뿐이고 이후에는 그저 여타 물건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남긴 것들을 너 역시 그렇게 취급할 것임을 안다. 어떤 것도 마지막까지 특별한 것은 없다. 그래서 너에게는 줄 것이 없다.
나는 단지 너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겠다. 네 삶도 내 삶만큼이나 무의미하며 네 기쁨도 내 기쁨만큼이나 희미하다. 나는 선구자로서 혹은 친구로서 너에게 조언한다. 어떻게 노력하든 간에 너와 나에게 이곳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바꾸기 위해서 애를 써도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네가 느끼는 그것들, 녹슨 못 같고 낡고 가치 없는 세상, 기울고 있는 배와 저무는 그림자와 죽은 개의 이미지, 그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네가 지표를 찾아 모퉁이를 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구멍에 빠진 네 삶 위에 세워진 이정표일 뿐이다. 삶은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엇도 베풀지 않는다.
음지식물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람 중 벌써 두 명이 자살했다. 그들의 부고는 핸드폰 문자로 날아왔다. 나의 부고도 너에게 그렇게 도착할 테다. 아마 음지식물 동호회에서 자살로 죽은 사람 숫자를 세면 분명 두 자릿수가 넘어갈 것이다. 음지 인간들은 쉽게 죽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양지에서 오래 살 수 없는 사람은 음지에서조차 오래 견디지 못하나보다. 이제는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적절한 옥상을 찾지는 못했지만.
적절히 볕을 주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바로 적절히 볕을 받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음지 식물들에게처럼 간접 조명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뜨겁지 않고 열렬하지 않은, 조용하고 일관적인 볕. 나에게 그런 볕은 한때는 너였다. 너는 뜨겁지 않다 못해 차가운 사람이었다. 손과 발부터 그랬다. 네 손을 처음 본 날 바짝 말라 수수깡 같은 손가락과 둥글고 작은 손톱에 눈길이 갔는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네 손은 언제나 차갑다는 사실이었다. 수족냉증 같은 것도 아니었다. 너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지만 너의 발도 언제나 차갑다고 들었다. 너는 맨발을 보여준 사람이 몇 없다고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여름에도 너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 목이 긴 흰 양말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양말에서 언니를 떠올렸다. 숨겨진 네 발은 예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발도 언니의 발처럼 하얗고 매끄럽지 않을까. 너도 언니와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왜냐면 너는 돌연 죽기 위한 여행을 떠날 사람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니와 네가 닮았기를 바랐다. 그러면 택시에서 언니가 뛰어내렸다는 내 가설이 더욱 힘을 얻을 것 같았다. 결국 너는 죽지 않지만, 죽는 것은 우리 자매이지만.
아마 너도 어느 순간에는 세상의 모퉁이를 돌고 새로운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당당하며, 마침내 구멍에서 환한 곳으로 기어 나온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진짜 밤이 오기 전에 아주 잠깐 스치는 일몰 같은 것일 뿐이다. 너에게 밤은 아주 길 것이고 새벽은 드물게 찾아올 것이며, 찾아오자마자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런 중에도 늘 희망은 있으나 그것은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를 보라. 어머니는 아직도 그 이탈리아의 택시 운전사를 잊지 못한다. 언니가 찍은 바닥의 모양을 근거로 언니의 동선을 따라 이탈리아 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혹시나 같은 택시 운전사를 만날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미 언니의 죽음 후 몇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택시 운전사는 얼마든지 택시를 팔고 다른 직종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운전사를 찾을 수 있다는 그 희망은 어머니를 계속해서 좀먹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란 곧 고통일 뿐이다. 어머니는 평생 택시 운전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고, 평생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평생 언니의 얼굴이 박힌 전단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언니가 다이어리에 쓴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은 알겠다.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이 별 의미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에게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있자니 죽은 자, 혹은 죽을 자의 말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네가 나의 당부들을 지켜주면 좋겠지만 나는 곧 죽을 자이므로 더는 네 삶에 간섭하지 못한다. 사실 네가 이 유서를 잊어도 괜찮다.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다. 만약 나의 어머니가 언니의 흔적을 보관하듯 평생 이 유서를 가지고 있겠다고 해도 좋다. 무엇이 어떻든 우리의 만남이 좋았다. 내가 너에게 유서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내가 지금 떠올리는 사람이 너라는 것이 기분 좋다.
단지 나는 마지막까지 이런 것들을 고민한다. 나는 나의 이름처럼 너에게 우주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너는 내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 음지 인간들은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이 죽을까. 혹시, 네가 양지식물 동호회로 옮겨갈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일까.
나의 스킨답서스는 아마 어머니에게로 갈 것이다. 어머니는 나처럼 스킨답서스를 볕에 쬐어 죽이는 짓을 하지 않을 테니, 그 화분은 곧 다시 무성해질 것이다. 스킨답서스는 나의 삶을 잡아먹고 살아나는 셈이다.
나는 정오에 죽으려고 한다.
언젠가 네가 마침내 죽는 순간이 온다면 부디 정오이기를 바란다. 이때의 볕은 아름답다. 너도 나와 같은 볕을 보며 죽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떤 죽음이든지 말이다.
오늘은 유난히 피부가 따끔거리지 않는 날이다. 나는 그물코가 성긴 니트 카디건을 입고 있는데, 그래도 내 팔뚝은 간지럽지 않다.
아마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내 죽음이 갑작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내 죽음에 어떤 이유를 찾으려고 할 테고 언니의 죽음과 함께 엮어서 생각해 볼 것이며, 음지식물 동호회에 대해서도 요란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유서가 없더라도 너는 내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내가 받은 문자를 받았을 것이다. 죽어버린 음지 인간들의 가족이 보낸 문자들 말이다. 어쩌면 그들의 장례식에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너도 알 것이다. 음지 인간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죽지 않을 사람은 미리 양지식물 동호회로 떠나버린다는 사실을. 음지식물 동호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 둘 죽어 마침내 동호회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 나는 부디 네가 그때까지도 살아있기를 바란다. 네가 마지막 음지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 음지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너도 죽어버리고 말겠지만.
너와 내가 디디고 있는 바닥은 단단하지 못하다.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면 너도 곧 나처럼 추락하게 될 것이다. 적절한 옥상을 찾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한 번 시작한 추락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죽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락이 시작되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네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바닥이 가라앉기 전에 구멍 속에서 나와야만 한다. 구멍 바깥에서 너를 사랑하는 자를 찾아야만 한다. 애니메이션 속의 저주 받은 주인공처럼 너도 나도 그림자 속에서 볕을 쬐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도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삶은 모호하다. 어느 것도 죽음만큼 확실하지 못하다.
똑, 다음에 딱, 이 온다는 것을 이제 정확하게 알겠다. 지금이 되어서야 나는 양지 인간으로 변신한다. 그렇지만 추락이 시작되었으므로 내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다행히 추락은 길지 않으며 신속하다. 나는 이탈리아까지 갈 필요가 없다. 너에게 직접 전화를 할 필요도, 네 이름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캐리어를 짠 바닷물에 던질 필요도 없고 담뱃불로 팔뚝을 지지며 살아갈 필요도 없다. 그저 추락 뒤에 죽고 만다. 나의 삶은 이토록 단순하다.
나의 스킨답서스, 나의 볕, 나의 사랑, 나의 아무 것도 아닌 너, 델마, 이 유서가 너의 인공 조명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음지식물은 인공조명이 있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양지식물 동호회로 옮겨가도록 해라. 음지식물 동호회와 음지 인간들은 잊어버리도록 해. 많은 사랑을 받아라. 구멍 속에서 기어 나와 이정표를 따라가. 이탈리아에 가지 마라. 높은 곳을 조심해라. 네 삶의 똑, 다음에 딱, 이 오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새들이 죽는 곳으로 간다.
-너의 사랑하는 갤럭시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