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복잡한 수학 문제나 어려운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닌, 그냥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상 따위를 적어놓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글이 심오하고 어려워 보일 때가 있긴 하다. 아무튼 시는 이야기라는 점을 주목해 보자.
생각이나 감정이 머릿속에만 남아 있다면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말하는 입'이 필요하다. 유식하게 말해서 '화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바로, 껀덕지! 무엇을 보던지, 듣던지, 느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그 껀덕지가 되는 '대상'이 있다.
모든 시는 화자가 대상을 관찰하고 감상하는 이야기가 기본이다. 화자가 대상을 관찰하는 과정, 이에 비롯된 생각과 느낌이 언어적 표현으로 정제되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 대상에 대한 화자의 관찰/감상
-시의 등장 요소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말하는 이(화자)와 예기의 껀덕지(대상). 이 중 화자는 '주인공' 혹은 '관찰자'로서 이야기를 이끌고 독자에게 전하는 역할로 비교적 고정되어 있지만, 대상은 그 역할이 무궁무진하다. 이야기의 껀덕지는 언제, 어디에서나 생길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대상은 화자와 상호작용 하거나, 관찰당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공간적/시간적 배경이 되는 등 이야기가 될만한 모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로 등장하는 대상을 우리는 어떻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까.
필자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굳이 복잡한 구분을 지으며 쓰진 않았다. 하지만 글을 써감에 따라 내용이 단조롭고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각 요소의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각 요소를 적재적소에 등장시키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필자는 다양한 대상의 역할을 크게 2그룹, '타인'과 '사물/현상'으로 나누는 것을 추천한다. '타인'은 이야기의 엑스트라로 화자와 상호작용을 한다. 이야기를 건네거나, 어떤 행동을 하기도 하고, 화자에게 관찰당한다. ‘사물/현상’은 이야기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으로 화자(주인공)와 타인(주변인물)이 움직이는 무대가 된다.
영화를 빗대어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영화를 이끌어가고 전달하는 주인공 혹은 관찰자가 바로 '화자'이다. 그리고 이 화자가 어떠한 사건에 닥친다. 이 사건에는 다양한 주변인물(타인)과 정보(사물/현상)들이 얽혀 있을 것이다. 주변인물들은 주인공과 상호작용하며 사건을 키우기도 힌트를 주기도 한다. 무수한 정보는 사건의 구체적인 윤곽으로 등장인물의 의상, 장소, 주변 사물 등이다. 시도 마찬가지로 화자, 타인, 사물/현상들의 긴밀한 배치에 의해 더욱 구성 있고 다채로워질 수 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연출에 의해 구성되듯 시에서도 각 요소들을 활용한 연출은 필수적이다.
1. 화자(주인공/관찰자) : 이야기를 전달
2. 타인(주변 인물) : 상호작용 or 관찰 대상
3. 사물과 현상(무대/정보) : 이야기의 장면과 흐름을 전개
-시의 전개에 따른 등장 요소 구성
이야기를 전개하는 모든 상황에 있어 3가지의 등장 요소 모두가 무조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치고 박는 액션신과 꿀 떨어지는 데이트신에서는 주인공/주변 인물/무대와 의상이 필수적이지만, 주인공이 혼자만 등장하는 독백에서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전개된다. 영화 '아저씨'의 유명한 머리 깎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주인공과 바리깡만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화자'와 ‘사물/현상’로만 구성된 시는 사물과 현상의 속성 또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한 전개로 이미지가 한정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더 집중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 우리가 영화'아저씨' 주인공의 결의를 인상적으로 느낄 수 있었듯이.
반면 화자/타인/사물과 현상이 모두 등장한다면 요소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다채롭고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시 한번 영화'아저씨'를 예로 든다면 '이거 방탄유리야 xx야' 씬을 들 수 있겠다. 주인공과 엑스트라, 그리고 방탄유리. 이 3가지의 요소들로 인해 박진감 넘치면서도 실소를 자아내는 명장면이 탄생한 것이다.
1. 화자 + 사물과 현상
: 사물과 현상에 대한 속성과 변화에 주목(집중된 이미지)
2. 화자 + 타인 + 사물과 현상
: 타인 자체 또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 확장(다채로운 이미지)
- 화자/사물과 현상
병실에 누운 시한부의 환자와 창밖에 곧 떨어질 잎사귀를 상상해 보자. 이야기는 환자(화자)가 잎사귀(사물)에 대한 관찰과 감정이입을 통해 전개될 수 있다. 잎이란 사물의 속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낙엽의 속성을 함축하고 있는 대상이다. 독자는 환자와 입사귀를 보며, 예정되어 있는 잎사귀의 추락과 곧 다가올 환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굳이 환자가 '나 죽는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화자가 잎사귀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시한부 환자(화자) + 잎사귀(사물과 현상)
: 화자의 죽음에 집중
- 화자/타인/사물과 현상
이 이야기에 환자의 연인(타인)을 개입시킨다면 더욱 다양한 장면을 포함하게 된다. 잎사귀에 대한 화자의 관찰과 감상뿐만 아니라 연인의 모습과 표정, 감정 등이 함께 표현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야기의 메시지가 환자의 죽음이 아닌, 연인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등으로 확장된다. '타인'의 등장으로 화자의 죽음 자체가 주는 인상이 반감됐지만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화자, 타인, 사물과 현상의 적절한 구성을 통해 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자유자재로 담아낼 수 있다.
시한부 환자(화자) + 연인(타인) + 잎사귀(사물과 현상)
: 화자의 죽음 + 연인에 대한 감정
‘잎사귀’의 ‘결국을 떨어지는’ 속성을 화자의 죽음과 연결하여 전개했듯, 창작자만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재해석과 의미부여는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여기에 연인(타인)의 등장을 통한 장면의 확장으로 이야기의 즐거움을 더 할 수 있다. 이처럼 집중된 대상으로 이야기를 연출할지, 다양한 대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출할지 고민하는 것은 창작의 재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