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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선택

존엄유지

by 오순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제력이 사라지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유권도 잃어가고 불안은 급증하고 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고령화 시기는 더 길어지고 그만큼 의존의 시기도 더 길어지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생명의 연장은 선물이 아니라 형벌이다. 존엄을 유지할 자유가 없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벌을 수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존적인 삶은 짐일 뿐 생산적이거나 창조적인 삶이 아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라는 저서에 한 파트에 '황혼의 반란'이란 글이 있다. 거기에서 사회보장의 적자를 70세 이상의 노인 때문이라며 사회적 제한을 가하는 제도가 실행된다. <자기들 몫의 회전이 끝났음에도 회전목마를 떠나지 않는 노인들>이라며 인구 과밀, 실업, 세금 등 모든 문제를 노인들의 탓으로 돌린다.


자식들한테 소식이 끊기고 나면 그들(OCPD라는 센터)이 노인들을 강제로 데려가 감금하다시피 수용하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자식들의 허락을 받고 본인 당사자들 의사는 무시한 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다. 죄인도 아닌데 죄수 같은 삶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에 반란을 일으킨 노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자 정부에서 이들의 존중해 달라는 의견을 무시한 채 강제로 독감 바이러스를 살포하여 살아남은 자는 강제로 독주사를 투입한다.


인간으로서 항의하고 존중을 원하던 그들의 분노와 배신은 그렇게 처분되고 만다. 너도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지만 닥치지 않은 노화를 젊은 그들이 실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지란 무엇인가.

건강과 안락한 환경으로 인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이다.


사회적 효용가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물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인을 짐덩이로 하락시켜 한 곳에 수용하는 것이 과연 그들을 위한 것일까.

자식을 부양하고 살아온 경제주체이었던 그들에게 갑자기 그 주권을 빼앗고 복지라는 개념으로 얼마간의 지원을 던져주는 것이 복지일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경제력을 유지하도록 일을 주는 것이 더 효율적인 복지는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인들의 불안은 극대화되어 갈 뿐 편안한 삶이라 볼 수 없다.

노인들에게 지원을 제한하고 줄이더라도 일자리를 창출해 그들이 살아갈 자유를 주어야 한다.

죄수에게 가장 큰 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가둬 두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죄수도 아닌 노인들에게 가장 큰 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짊어져야 할 짐덩이가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늘어나는 고령화를 숫자상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력을 유지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고안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신은 나에게 작장을 주어야 했다'는 프랑스 영화가 떠오른다.

하루라는 것이 아침에 해가 뜨고 질 때까지이다.

우리 인간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삶이다.


눈부신 석양이 하루의 일부인 것처럼 황혼도 삶의 일부이다.

황혼을 그들의 삶에서 제거할 권한이 그 누구에게도 없다.

황혼의 반란은 존중해 달라는 요구이며 선택이다.


진정한 복지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까지 있어온 것을 유지하기 위해 침대 크기에 맞춰 사람을 자르는 괴물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변화된 사회에 맞게 침대를 개조해야 한다,


황혼의 반란이 아닌 황혼의 선택이 진정한 복지이다.



[제목바탕사진출처: 구글검색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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