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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순자 Dec 01. 2023

배고플 때조차 먹기보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최순자(2023). 배고플 때조차 먹기보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공명재학당. 2023. 11. 30.  


사진 KBS 청주방송국 특별기획 영상 캡쳐     


깊고 깊은 가을 끝자락, 11월 마지막 날 오후 6시부터 코로나19가 가져다준 비대면 국제회의를 시작했다. 내년 1월 중순에 오사카교육대학에서 있을 한일 대학생 교류회를 위한 연구자 회의였다. 한 시간 정도 진행한 회의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오후 6시 30분경 도착한 문자가 있었다.      


https://youtu.be/rmJnVN50AJ0?si=TD-tfGApN579AU3V 저녁 시간에 시청해 보면 좋을 듯~~^^. 1945년생으로서 서울대 음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실력의 한계를 느껴 장학생으로 독일에서 공부한 박영희 작곡가 ~~^^. 동서양 막론하고 최초로 여성이 베를린 예술대상을 수상한 한국인. 80년 광주 진실을 우리는 몰랐을 때 독일에서는 바로 중계가 되어 종일 시청하면서 슬픔을 숙제로 받아들여 작곡하심. 숨소리, 살아있는 음악. 한국을 독일에서 빛낸 작곡가 박영희가 많아서 '영희 박 파안(웃는 얼굴)'로 살아오심. 지금은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 최 박사와 비슷한 성향임. 초지일관♡”     


여고 친구로부터 온 내용이다. 바로 링크를 클릭해서 시청했다. 약 한 시간 분량이었다. 댓글도 달아주면 좋겠다는 친구의 부탁으로 댓글도 썼다.      


“영희, 박-파안 선생님의 평안과 저희와 오랫동안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허기를 달래야 할 때조차, 일하는 작곡가의 길을 택하셨던 선생님, 먼 곳에서 그리움을 승화시켜 '소리'를 비롯해 감동적인 곡 들려주시고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로' '존재' '공감' 등의 말씀도 새기겠습니다. KBS 청주방송국(강지윤 피디)과 기록문화팀에도 감사드립니다.' 기록은 힘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들 지치지 않고 하고자 합니다.”     


음악에 문외한 나는 처음 접한 작곡가였다. 제2의 윤이상이라 불릴 만큼 세계적인 작곡가였다. 여든을 앞둔 파안(琶案) 선생에 관한 글과 영상을 찾아봤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지어주었다는 호 파안은 한자로 ‘책상 위의 비파’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음악가가 되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거기다 파안 선생은 ‘파안대소’라는 의미를 부여, 자기 음악을 접한 이들이 환하게 웃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조국이 일제강점기에서 독립한 1945년 청주(전, 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찍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의 아버지는 교량 설계사로 시를 짓고 퉁소를 불고 국악을 즐기셨다. 딸의 손을 잡고 국악판이 벌어지는 시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때 만난 해금을 불던 걸인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하실 때는 노래를 불러드렸다. 그렇게 영혼을 나누던 아버지가 열 살 때 세상을 뜬다.     


그는 편지를 써서 음을 붙여 하늘의 별이 되신 아버지께 보낸다. 딸의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이미 그때 받아보았을 터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동생의 성장을 걱정한 둘째 언니는 사범대생으로 피아노를 칠 줄 알았다. 언니는 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다.      


49년 전,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간다. 가정 형편상 사범대를 권했던 어머니도 “원 없이 공부하고 오라.”고 응원했다. 그 어머니의 지지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소리로 다가오는 고향의 향수는 그의 음악의 샘물이 된다.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접한 슬픔을 ‘소리’로 작곡한 깨어있는 의식이기도 하다. ‘여성’의 존재에도 눈을 돌리고, 제자들에게는 “예술가는 위로, 공감을 주어야 한다.”라며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배가 고플 때조차 예술가가 아닌, ‘일하는 작곡가’로 떨리는 가슴으로 연필을 잡고 악보를 그리며 ‘음악은 질투’라 했다. 스물아홉에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던 시가 떠오른다.      


내가 라면으로 한 달을 버티던 허기질 때조차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일은 무엇일까? 공부, 책 등이었던 같다. 그 내면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파안 선생이 머나먼 이국에서 접하고 슬픔을 음악으로 녹여낸 1980년 광주의 장본인은 대학 학창시절 나에게 “지도자의 저런 생각은 어떻게 형성됐을까?”라는 화두를 갖게 했다. 그 고민 끝에 현해탄 건너 7년간 인간발달을 공부했고, 어린 시기 발달의 중요성을 알고, 그 길에 천착해서 걷고 있다.      


파안 선생도 어린 시절의 아버지 내면의 세계, 어머니를 비롯한 사랑이 지금의 그로 존재하게 하는 것 같다. 맡은 과목 중 <청소년 심리> 강의를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청소년 상담을 하는 수녀님의 글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청소년을 만나 얘기 나누다 보면, 그들의 가슴 속에 그리워하는 이들이 없어요.”라고 했다. 반면에 파안 선생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작곡가가 되게 했어요. 그 그리움이 없었으면 아마 작곡가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 했다. 사랑이 그리움을 낳게 하고, 그 그리움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나도 꽃과 음악을 좋아하시고, 단 한 번도 나에게 화내지 않으시고, 친지 제삿날 내 손을 잡고 다니시던 아버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 교문에서 기다리셨다가 짜장면을 사주시던 아버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골목길 어귀에서 기다리셨다가 딸이 보이면 말없이 앞서 뒷짐을 지고 걷던 아버지가 내 그리움의 원천이고,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다. 그 사랑이 글을 쓰게 했고 지역 한국문인협회 주최 최우수상도 받게 했다. https://blog.naver.com/kje06/60174370047     


한때 역사학도 대학 시절 독일로 역사철학을 공부하러 가고 싶어 독일어 공부도 해봤다. 그런 독일 땅은 백 세의 반 오십을 앞두고 밟았다. 남은 삶 반평생은 고정관념, 편견 없이 ‘괜찮은 나’로 살고 싶었다. 스스로 한 달간 가두고 생각하고 싶어 영국 버밍엄에 갈 때 경유지로서이다. 프랑크푸르트 상공에서 독일의 산과 들, 마을을 내려다보고 공항 책방에 들러 기념품을 산 추억이 있다.      


독일 하면, 내 조국의 숙명론적인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동서의 가교역할을 한 베를린과 독일통일 과정을 살펴보게 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79036&CMPT_CD=SEARCH 이제는 작곡가 ‘영희, 박-파안’ 선생의 치열한 삶과 사랑도 포함될 것 같다.     


출향예술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기록문화팀도 기회가 되면 찾아가 보고 싶다. 주로 건강한 인간발달에 관한 일을 하지만, 후대를 위한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르신 생애구술사 https://brunch.co.kr/@sjchoi1019/540 , 근대기록물남기기 등도 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kje06/222834085555 이번 영상을 통해 ‘내가 사는 곳, 내 고향의 출향인에 대한 기록남기기도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연말인 12월 11일 오후 1시 KBS1 TV에서 파안의 삶과 음악을 들려준다니, 아직 그를 접하지 못한 이들은 채널을 고정해 봄 직하다. 그의 환한 미소, 순수한 영혼, 치열함에 전이되어 2024년을 새롭게 열어가게 할 것이다. 나는 이미 전이되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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