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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큐레이팅, 딸과 함께 소중한 일상

by 별빛소정

딸이 부산에 온 첫날 저녁, 뭘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고민 없이 "방어!"라고 외친다. 그동안 내가 방어를 먹을 때마다 인증샷을 보내서인지, 딸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서울 노량진시장에서 몇 번 먹어봤지만, 부산에서의 그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단골 횟집으로 데려가 방어 한 접시를 주문했다. 한 점을 입에 넣더니, 감탄하며 소주 한 병을 기분 좋게 비운다. "역시, 맛있네요!" 딸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흐뭇하다.

다음 날 아침, 겨우 눈을 뜬 딸을 깨워 떡국을 먹였다. 서울에서 혼자 살 땐 주말마다 12시간씩 잔다지만, 집에 왔으니 아침밥은 필수다. 평소엔 아침을 거른다더니, 떡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점심엔 영화 '하얼빈'을 보러 갔다. 책으로 먼저 접했던 이야기지만, 영화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배우들의 연기, 세련된 촬영 기법,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까지 완벽한 명작이었다. 감상평을 묻자 딸이 뜻밖의 고백을 한다. "영화는 좋은데... 사실 아저씨들의 얼굴을 구별 못 하겠어요." 이동욱 외에는 다 비슷하게 보여서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생각해 보니 어두운 화면에 다들 모자를 쓰고 비슷한 복장에 수염을 기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영화를 본 뒤 롯데백화점에 들렀다. 대학 때 입던 낡은 패딩을 여전히 걸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새 옷을 사주려 했지만, 딸은 "패딩은 10년에 한 번 사면 되죠! 서른 살 기념으로 하나 장만할래요." 예상치 못한 철학에 웃음이 터졌다. 패딩이 아니라면 회사에서 입을 깔맞춤 트레이닝 세트를 사자고 제안했더니, "세트 추리링은 너무 파격적이에요. 첨부터 너무 튀면 안 돼요."


그럼 옷은 도대체 어디서 사냐고 묻자, "당연히 테무죠. 백화점에서 옷을 왜 사요? 비싼데." 라며 태연하게 대답한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바지는 할머니가 구해준 곰돌이 자수가 새겨진 여름바지다. "부산은 시원하네~" 라며 여름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우습기도 하다.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에도 갔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매주 허심청으로 온천을 갔었는데, 같이 목욕을 한 건 1년 만이다. 명절을 앞두고 사람이 많았다. 나의 목욕탕 루틴대로 사우나와 냉탕을 세 번 오가고, 서로 등을 밀어주며 살가운 시간을 보냈다.


목욕을 마치고 "바나나우유 사줄까?" 하니, 딸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건 너무 달고 헤비 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주세요." 바나나우유가 국룰 아니냐고 하니, "그러려면 어릴 때부터 사주셨어야죠!"라며 씩 웃는다. 돌이켜보니 정말 한 번도 사준 적이 없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께서 전화하셨다. "전 붙이러 와라!" 목욕 가방을 들고 바로 엄마 집으로 향했다. 올해부터 명절 제사는 지내지 않기로 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정성을 다해 9가지 전을 준비하셨다. 명태전, 우엉전, 동그랑땡, 깻잎전, 꼬치전, 새우전, 호박전, 햄전, 양파전까지! 정성이 대단하다. 딸은 거실에 쪼그려 앉아 전을 부치며, 중간중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이런 게 진짜 K-컬처지!" 힘든 가사노동도 딸에게는 재미로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 영화, 목욕, 그리고 따뜻한 가족의 시간까지. 하루가 꽉 차게 지나갔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한 하루, 참 즐겁고 행복했다. 문득,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에는 작은 선택 하나도 내 손을 거쳐야 했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때론 어른스럽고, 때론 여전히 아이 같지만, 그런 모습이 대견스럽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도와줄 것이다. 무엇을 꿈꾸든, 어떤 길을 가든, 변함없이 그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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