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달이 되었다. 자식들도 점점 어머니를 잊어가겠지만, 구십 년을 사셨던 어머니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그 삶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젊은 날의 헌신
어머니는 스무 살 즈음에 시집을 오셨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누이 두 명과 시동생 한 명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농사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랴 시집살이하랴 그 세월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러면서 딸 둘, 아들 다섯, 총 일곱 아이를 낳아 키우셨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밭에서 기른 채소며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 가는 아이들 도시락을 싸놓고 시장으로 향하면, 돌아오는 길은 늘 한밤중이었다. 한 번은 돌아오는 배가 끊겨 집으로 오지 못해 뱃머리에서 울고불고하시다가 어촌 이장의 도움으로 겨우 새벽에 집에 도착하신 적도 있었다.
시아버지는 배를 탔지만 술주정이 심했다. 주기적으로 집안 살림을 부수었다. 농사일과 장사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술에 취해있었다. 밤새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을 견뎌야 했고 한밤중에 집 밖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새벽녘 남편이 지쳐 잠들면 그제야 들어와 몸을 뉘이고 눈을 붙였다. 시어머니, 시누이와 시동생 사이에서 어머니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잠시도 발 뻗고 편히 쉴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병과 자식들의 성장
그 고된 세월 탓일까. 어머니는 병을 얻으셨다.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병원에 가도 병명이 없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그 병을 앓으셨다. 70이 넘어서야 병명을 알았다. 화병으로 인한 우울증이라 했다.
아이들은 줄줄이 7명, 다들 공부를 잘했다. 큰아들은 고등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고, 삼성중공업에 입사했다. 둘째도 기계공고에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나의 남편인 셋째는 거제도 고등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큰 형님의 회사 지원 덕분에 셋째부터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들은 대기업, 은행, 건설회사에 차례로 취직했다.
큰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조무사가 되어 부산에서 자리 잡았다. 누나는 동생들이 부산의 대학에 오면 단칸방에 함께 지내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동생들을 보살피다 자신은 혼기를 놓치고 평생을 혼자 사셨다. 어머니가 중학교까지만 공부시키면, 자식들은 고등학교부터는 자력으로 갔고 대학생활은 큰 형님과 큰누나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평화가 찾아온 노년
57살이 되던 해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어머니의 고된 결혼생활이 조금 편안해졌다. 여전히 할 일은 태산 같았지만, 남편의 폭력과 그 이후 이어진 병수발에서는 해방되었다. 자식들에게 더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해하셨지만, 다들 알아서 잘 커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내가 시집왔을 때, 어머니는 63살의 젊은 할머니였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 도착했더니, 밥상에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색시라고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없었다. 오히려 오래된 며느리처럼 이것저것 일을 시켜놓고 바깥일을 하러 나가셨다.
내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산모 몸에 좋다는 익모초를 밤새 가마솥에 고아 페트병 두 병에 담아, 농사지은 채소들을 바리바리 싸서 친정집까지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오셨다. 며느리에게 줄 보약을 이고 지고 친정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골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쓰디쓴 익모초 보약을 나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거제도 시댁에 갔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셨지만, 철이 든 자식들은 알아서 필요한 일을 도왔다. 나의 남편은 일이 있어도 할 줄 모르고 낚시한다며 나가버렸다. 일을 시작하더라도 10분쯤 하다 사라지곤 했다. 남편이 사라진 빈자리는 어머니와 내가 채웠다. 어머니는 “셋째는 물가에 내놓은 얼라 같아, 일을 못 시킨다”며 웃으셨다.
어머니의 밭은 예술작품 같았다. 구획 정리가 딱딱되어 고추, 배추, 시금치, 마늘, 양파, 옥수수 등이 제철마다 풍성하게 자랐다. 계절마다 식물들을 줄 맞춰 아름답게 길러내는 것을 보면 늘 감탄스러웠다. 그 수확물들은 김치가 되고 양념이 되고 반찬이 되어 자식들 집으로 보내졌다.
어머니는 흥이 많아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셨다. 마을 한가운데 있던 우리 집 마루에는 늘 커다란 카세트플레이어가 놓여있었다.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우리 집 마당은 저녁마다 신나는 놀이마당이 되었다. 마을 아지매들이 모여 신나는 트로트 노래를 틀어놓고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 야무지게 살아라
젊을 때부터 발병한 화병은 주기적으로 어머니를 괴롭혔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화장실도 못 가는 병. 병원에 가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리만 들으셨다. 우울증 약을 먹어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90살에 되어 다시 발병한 그 병은 병원에 가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날, 남편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또렷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살아라”라고 당부하셨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던 셋째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다른 자식 누구에게도 당부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덥지 못했던 남편에게만 남긴 유언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우리 가족은 “야무지게”를 가훈으로 삼았다. 밥도 야무지게 먹고, 일도 야무지게 하고, 청소도 야무지게 하며 뭐든 야무지게 하자고 다짐한다. 아침마다 하이파이브를 하며 “오늘도 야무지게”를 외친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던 어머니, 그 고된 삶 속에서도 자식들에게는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분. 하늘에서는 좋아하시던 노래 부르고 춤추며 평안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걱정하던 셋째 아들은 여전히 철이 없지만, 어머니가 주신 사랑을 조금씩 깨달으며 조금은 더 야무지게 살고 있답니다.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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