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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Dec 13. 2024

초록빛 정글, 잊혀진 사랑의 기억

식물과 나의 이야기

지난달, 거제도에 간 김에 거제 식물원에 들렀다. 파란 하늘에 솜사탕 같은 흰 구름이 둥둥 떠 있고, 각종 꽃들이 만개해 마치 작은 축제가 펼쳐진 듯했다.


야생화 전시동으로 들어서니 마삭, 스킨답서스, 호야, 몬스테라, 비비추 등 익숙한 식물들이 반갑게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남편이 웃으며 “몇 해 전에 여기 왔으면 네 눈 돌아갔겠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나는 외출 대신 집에서 식물을 키우며 위안을 삼았다. 아파트 베란다는 어느새 130여 종의 식물로 가득한 초록빛 정글이 되었고, 하루하루의 일상이 마치 초록빛 속에서 펼쳐지는 작은 모험 같았다.


당시의 나는 네이버 식물 카페에 열성적으로 글과 사진을 올리며 활동했고, 스스로가 전문가처럼 느껴질 정도로 식물 공부에도 몰두했다. 대부분의 식물 이름과 키우는 방법은 꿰뚫고 있었고, 카페 회원들은 나를 ‘금손’ 혹은 ‘식물의 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손재주가 좋아 식물들을 흙 한 점 흘리지 않도록 정성껏 포장해 카페회원들에게 택배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식물 가꾸기는 매일 일찍 일어나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듯 물을 주며 시작했다. 퇴근 후엔 2-3시간 정성을 들여야 했지만 그 시간이 그저 행복했다. 주말에도 분갈이 때문에 외출은 엄두도 못 냈다. 외출은 주로 식물구경이나 관련 쇼핑 때문이었다. 휴대폰 사진첩은 식물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고 내 삶은 거의 3년간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 식물 사랑은 뜻밖의 사건으로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목욕탕에서 넘어져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워도 아프고, 앉아도 아프고, 심지어 기침을 하거나 웃기만 해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화분을 들거나 물을 주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일은 더 큰 고통을 불러왔고, 결국 식물들에게 쏟던 정성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식물과 멀어졌고, 베란다의 초록빛 정글은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식물들은 주인의 발걸음을 듣고 자란다. 식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수록 초록빛 생명체들은 점점 말라 들어갔다. 처음에는 당근에 팔거나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그것도 식물을 들고 나르는 움직임을 필요로 했기에 더 이상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렇게 식물에 대한 3년간의 열정이 몇 달 만에 식어버렸다.


식물원에서 만난 다양한 식물들은 예전에 내가 키우던 녀석들처럼 느껴졌다.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옛 애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도 아련했다. 예전처럼 다시 식물을 들이고 가꿀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과거의 열정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관심과 사랑을 주는 만큼 빛을 발하고, 그 빛은 다시 내 삶을 비춰준다. 베란다의 초록빛 정글은 사라졌지만, 그 시간들이 남긴 행복과 배움은 내게 소중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며, 매일을 새롭게 가꾸고 싶다.                     


“너를 사랑해서 나는 행복했다.”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이 말이 가득 차오르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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