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빨강 색연필이 필요하대서 교습소에 있는 색연필들을 몽땅 꺼내보았다. 돌돌 돌려서 사용하는 색연필, 실을 잡고 돌려 종이 껍질을 벗겨 사용하는 색연필, 보통 연필 두께의 얇은 나무 색연필, 손가락 두께만 한 굵은 나무 색연필, 직육면체 모양의 색연필... 다양한 색연필을 갖고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중 나무 색연필, 특히 연필 두께의 나무 색연필을 좋아한다. 연필 칼로 나무를 깎아내릴 때 들리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하고, 진하지 않게 칠해지는 부드러운 색감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플라스틱에 들어있어 돌돌 돌리는 색연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나무 냄새가 좋다. 마치 알록달록한 숲이 통째로 책상 위로 옮아온 듯하다. 숲으로 그림을 그리니 마음은 푸근하고 맑아진다.
그런데 너무 뾰족하게 깎아 쓰는 건 그다지 즐겁지 않다. 뾰족한 색연필 끝으로 선을 긋다 보면 나도 모르게 꾹꾹 눌러 힘을 주게 된다. 약간 반짝거리며 종이를 파고드는 선의 흔적이 도드라져 내 마음도 울퉁불퉁해지는 것 같다. 그보다는 약간 뭉텅한 끝이 부드럽게 만들어내는 선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줘 좋다. 나도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무엇이든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평소에 늘 사용하던 색연필인데도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보니 새로운 것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따라오는 즐거운 상상 시간, 행복한 시간.
아, 참. 빨강 색연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손가락 두께의 빨강 나무 색연필을 하나 빼 가방에 챙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