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 글쓰기 - 08
나는 어쩌면 전생에 식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식물을 키워보면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해가 지나치게 강한 여름날엔 모두 축축 늘어져 금세 죽을 듯 기운이 하나도 없다가도 시원한 물줄기 하나로 다시 살아나 생기를 되찾는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은 뿌리째 뽑혀나간 친구 옆에서 사투를 벌이며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적당한 빛과 물이 허락되면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줄기를 뻗고 꽃과 열매를 맺는다. 나도 그렇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심장이 오락가락 하니 말이다.
게다가 식물은 제아무리 태양이 뜨겁게 땅을 달구어 대도 걸어서 물을 찾아가지 못한다. 묵묵히 다음 물을 기다리며 최대한 숨을 참는다. 식물은 참고 믿고 기다리는데, 선수다. 그래서 가끔 나는 ‘어쩌면 전생에 식물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살다 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고 참고 또 참으며 하고 하고 또 할 수 있다. 나도 참고 믿고 기다리는데, 선수다. 나는 아무래도 식물이었던 게다.
식물도 여러 종류가 있다. 땅에 붙어 나지막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풀, 자신을 한껏 피워내 세상을 살리는 꽃, 뿌리를 뻗고 뻗어 흔들림 없이 자신을 세우는 나무... 전생에 식물이었다면 이왕이면 덩굴 식물이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줄기든 뿌리든 튼튼히 서로를 얽고 감싸, 끝없이 뻗어가는 덩굴. 식물임에도 손이 있는 듯 어깨동무를 하고 발이 있는 듯 먼 곳을 향한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지평을 넓히고 담을 넘고 세상을 가득 덮는 덩굴.
날씨가 조금만 바뀌어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물 한 바가지에도 금방 생생 해지는 식물이 좋다. 그 생명력이 좋다. 느리지만 어느새 세상을 덮어버리는 덩굴, 꽃, 잎... 어쩌면 전생에 식물이었을지도 모르는 나. 현생에서도 그렇게 식물처럼 살고 싶다.
<사진 출처 : EBS_식물_꽃_0081/한국교육방송공사(저작물 40455 건)/공공누리/CC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