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동안 사람의 마음에 대해 궁금해했고 그와 관련된 공부를 끊임없이 해왔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의 마음보다 얼굴을 더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연필초상화를 배우면서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 그의 말하는 입술, 눈과 코를 자세히 관찰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 허벅지에 손가락으로 그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의 눈, 코, 입이 이렇게 생겼구나...'하며 새삼스레 신기해하고 있다. 관찰한 것을 최대한 실감나게 그려보고 싶어서 속눈썹 하나하나, 눈꺼풀의 두께, 눈동자에 비친 창문까지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그렇게 관찰하고 사진 그대로 옮겨 그린 것 같은데, 그림이 만화처럼 ‘납작하게’ 보인다. 계속 고치고 또 고친다. 강사님이다가와, ‘스케치에서 고칠 곳은 없어요...’하시며, 내 그림에 쓱쓱 그림자를 넣어주신다. 마법처럼 그림이 살아난다. 납작하던 얼굴에 입체감, 생동감이 생겨난다. 그림자가 이토록 중요했구나....
그림에 입체감을 주려면 그림자를 넣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인격안에도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칼 구스타프 융을 떠올린다. 그는 중년기 이후에는 그림자를 인격안에 통합시켜야 건강한 개성화-자기다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심리치료에서 강조점을 두는 것은 ‘자기다움의 회복’이다. 자기다움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증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자기다움을 찾지 못한 자들이 보이는 증상은 다양하다. 여러 증상 중 하나는 불안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타인의 요구에 고분고분 순종하며 ‘착한 사람이다’라는 칭송을 받지만, 혼자 남겨지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차 알 수 없어서 불안하다.
은퇴 후 우울증을 앓는 전문직 남성 내담자M은, '취미생활 하나 정도는 해보시는게 어떠세요? '라는 권유에 '평생 일만하고 살아서 일 말고 뭐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뭘 해도 재미가 없고요...' 사회적 지위, 남부러울것 없는 환경에 도달했지만, 내면이 텅비어있는 느낌이 든다고 호소한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친구에게 토로하면 '네가 세상에 뭐가 부러울게 있냐...'라는 소리만 들을 뿐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 안의 불안과 공허감을 혼자 삼키느라 우울해졌다.
외부에서 보는 '스케치'는 흠잡을 만한게 없는데, 왠지 내 '그림'에 생동감이 없다면,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봐야할때다. M은 자신 안의 부정적인 감정도 모두 무의식속에 넣어버려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라는 페르조나에 가려진 수치심, 불안은 고스란히 꿈에 드러나고 있었다.
"저는 늘 여행지에서 공항으로 가는 꿈을 꾸는데, 항상 도달하지 못하고 초조해하다가 잠에서 깨어요. 지난 밤에는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호텔에서 침대 시트를 뜯느라 비행기를 놓치는 꿈을 꾸었어요."
그는 꿈을 연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머저리같이...'라는 말을 뱉었다. 자신 안에 담겨있던 오랜 수치심이 툭 튀어나오면서 분석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하고살면서, 자신 안의 열등한 모습을 아들과 아랫 사람에게 투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수치스러운 모습은 내 안에 있지 않고 바로 네게 있는 거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투사와 투사적동일시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자 투사
유난히 꼴보기싫은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반가와해야할지 모른다. 나의 그림자와의 조우일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나는 김혜수를 유난히 꼴보기 싫어했었다. 심리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당당한 여자가 되고 싶은데 나에게는 그렇게 내세울게없는 것 같다'는 마음을 그녀에게 투사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안에 있던 열등감을 딛고 일어난 지금은 당당한 김혜수를 좋아한다. 그녀처럼 당당하게 걸으려 노력한다.
내 안에는 내가 인정하기 싫은 못나고 열등한 모습이 있다. 그것 역시 내 안에 있는 내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기답게 살 수 있다.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감옥의 장기복역수 레드는 누군가 지시하는 삶에 오랜 시간 길들여져서 화장실 가는 일조차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야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40년동안 허락을 받고 오줌을 쌌다. 허락없이 오줌 한방울 나오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에게 감옥에서의 시간은 자유로운 삶 뿐 아니라, 자기다움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일이라는 ‘감옥’, 역할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40년'을 살았는가? 그래서 일에는 전문가가 되었고, 역할에서는 탁월한 결과를 내고 있는가? 그러나 일에서의 성취가, 역할에서의 만족이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100세까지 살아야하는 시대에서는 누군가 나에게 요구하는 일, 타인을 만족시키는 역할로만 살수 없다. 중년기 이후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허감은 내면에서의 비명소리일지 모른다. ‘이제는 나답게 살고 싶어!’라는 강렬한 외침일지 모른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그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생동감있는 그림을 위해서 스케치보다 그림자가 중요하듯, 자기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 안의 그림자 인격을 알아차리고 계발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중년기 이후 공허감으로부터 탈출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