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 수줍은 고백앞에서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지난 주 영상통화 중,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하는 아들부부의 표정은 밝았다. 기다린 아기였다. 모두다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무룩한 한사람, 그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안이 아프게 전해져왔다. 늘 밝기만했던 손주에게 슬픔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손주는 올해 만4세가 되어 인생 첫 유치원에 입학했다. 학기초 몇달은 엄마와의 분리를 겪어내느라 병을 달고 살았다.
드디어 손주가 기다리던 방학식날, 엄마와 헤어지지않고 하루종일 집에서 놀 수 있게 되었다. 일년간 잘버텨낸 손주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러 기꺼이 서울로 달려 갔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와 품에 안긴다. "우와~대단하다. 개나리반을 무사히 졸업했네! 수고했어~"
밤이 되니 자기 텐트로 나를 들어오라고 하고는 텐트 지퍼를 내려버린다. 동생의 초음파사진을 내밀며 '너에게 동생이 생겼어~너두 좋지?'라고 한 엄마도, '이제는 오빠가 되었으니 이거저거 하지말라'고 하는 아빠도 못 들어온다.자신의 수고를 알아주는 할머니만 텐트 속에 들어갈수 있단다.
손주를 재우려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손주가 맥락없이 "사랑해요, 할머니~"라고 고백한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들어오며,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 묵직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평소보다 쉽게 잠들지못하는 손주에게 '왜 잠들기가 힘든거야?'라고 물으니, '저는 걱정이 많아요. 눈을 감기가 무서워요...'라고한다. 나는 <겁이 나는 건 당연해>라는 그림책을 읽어주었다. 내 손을 한참 만지작거리며 듣고 있더니 또르르 굴러 내품안에 안겨 곤히 잠들었다.
많은 걱정을 뒤로 하고 잠이 든 손주를 바라보며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몇번이고 말해준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라도 듣고 싶었던 그 말을 속으로 되뇌인다.
'네 마음 나도 알아...동생이 생긴다는 건 좋기도하지만 왠지 불안한 일이기도 하지...동생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엄마는 아기를 보느라 바빠지겠지...하지만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않을거야'.
인생의 과제는 이렇게 어린 나이에게도 끊임없이 주어진다. '개나리반'을 마치면 엄마와 매일 집에서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년이 되면 '진달래반'에 적응해야하는 과제가 생겨 버린다. 영원히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왕좌'에 앉아있을 줄 알았는데, 그 자리를 동생에게 내어줘야하는 씁쓸한 과제가 주어져 버렸다.
인간은 누구나 그 시절의 '왕좌'를 마음깊이 간직한다. 영원히 그 자리를 추구하며 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가보아도 그 상실감을 메울 수는 없다는 것이 인생의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