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페테르스 Clara Peeters 1594?-1657?는 17세기 플랑드르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이자, 정물화의 개척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출생과 사망 연도, 결혼, 가족이나 사회적 배경 등 모든 것이 미스터리이다. 다행히 약 40여 개의 작품들이 살아남았으나, 20세기 초까지 그녀의 이름은 미술사에서 꽁꽁 숨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무명의 여성 화가의 이름이 어떻게 다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일까? 2016년 10월에서 2017년 2월까지, 앤트워프의 왕립미술관과 록코스하우스미술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은 공동으로 클라라 페테르스의 전시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관람자들은 알려지지 않았던 이 17세기 정물화가의‘맛있는 정물화’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전시회를 주관한 프라도의 르네상스, 북유럽회화 담당 수석 큐레이터인 알레한드로 베르가라는 클라라 페테르스 전시회를 열게 된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이야기 한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프라도를 방문해 그에게 물었다. “여성 미술가들은 어디에 있는 거죠?” 그러나 그는 아내의 뜻밖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어떤 여성 미술가도 전시관에서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곧장 창고로 달려가 페테르스의 작품들을 꺼내왔다. 그리고 후에, 프라도 미술관 관장이 여성 미술가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그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페테르스를 추천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400년 전의 화가는 21세기의 우리 앞에 다시 돌아왔다.
페테르스, <포도주잔, 말린 과일, 과자가 있는 정물화>, 1611, 나무에 유채, 52 x 73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클라라 페테르스의 최초의 전시회에 초대된 정계, 문화계 등 각계의 인사 모두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전시회를 통해 이 17세기 여성 거장의 풍요로운 식탁을 구경하면서, 비로소 감탄사를 연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정물화에는 재미있는 숨은 그림들이 곳곳에 감춰져 있었다. 이 정물화에 백랍 주전자 위에 4개, 황동색 금속 고블렛에 3개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마치 클라라 페르테스가 사람들이 언젠가 정물에 숨겨진 작디작은 그녀의 자화상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기를 염원하면서 수백 년의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클라라 페테르스의 정물화 속 자화상(위 그림의 세부)
페테르스는 포도주잔, 접시, 동전, 식기 등의 빛의 반사에 특히 매료되었다. 이전에,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가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초상을 그린 것을 비롯해, 15세기의 몇몇 플랑드르 화가들이 거울에 반사된 자화상을 그림 속에 그려 넣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랫동안 아무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고, 더욱이 정물화에서 식기류에 비친 자화상을 시도한 화가는 그녀가 최초이다. 그녀는 자주 고블렛이나 금박 입힌 컵, 단지의 금속 뚜껑 등 그림 속 사물들에 반사된 아주 작은 자화상들을 그렸다.
그녀의 이러한 조그만 초상들은 관람자를 그림에 가까이 가서 세세히 살펴보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드디어 화가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에는 자화상을 그림 속에 그려 넣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로 들어오면서, 미술가들은 작품의 창조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서명하지만,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여전히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들은 대체로 남성의 이름이나 익명으로 미술 시장에 팔려나갔다.
아마도 페테르스는 그림 속에 자신의 자화상을 여러 개 숨겨놓음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온통 남성 미술가들에 의해 장악된 미술계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을까? 어쩌면, 그녀는 매우 현대적인 여성의 자의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정물화의 개척자
ㅡ 식욕을 돋우는 정물화
‘아침 식사 ’ㅡ 치즈, 빵, 버터, 프레첼, 그리고 아몬드
페테르스, <치즈, 아몬드, 프레첼이 있는 정물화>, 1615, 나무에 유채, 34.5 x 49 cm, Koninklijk Kabinet van Schilderijen Maurit
냠냠 맛있는 것들과 예쁜 그릇들, 그리고 삶의 기쁨
페테르스, <새매, 가금류, 도자기와 조개껍질이 있는 정물화>, 1611, 나무에 유채, 52 x 71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페테르스, <맛있는 것들, 로즈메리, 와인, 보석과 촛불이 있는 정물화>, 1607년, 나무에 유채, 23.7 x 36.7 cm, 소장 미상
페테르스, <오렌지, 올리브와 파이가 있는 테이블>, 1611년경, 나무에 유채, 55 x 73 cm, 프라도 미술관
페테르스, <게, 새우,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화>, 1607-21, 캔버스에 유채, 70.8 x 108.9 cm, The Museum of Fine Art, 휴스턴
페테르스, < 촛대와 생선이 있는 정물화>, 1611, 나무에 유채, 50 x 72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