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종 Sep 29. 2021

손이 많이 가는 여자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 손이 많이 가는 여자



 그날도 여름이었다. 나와 밖의 구분이 가장 분명해지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봄과 가을만큼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계절이 또 있을까. 적당한 온도와 바람, 옷을 입지 않으면 춥지만 걸친 옷이 방해가 되지는 않는 계절. 봄이나 가을에는 나와 밖의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다. 겨울은 또 어떤지. 더 입고 두터워지려고만 하는 계절.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덧대려 노력한다. 분간도 없이 더 가지려 하는 계절. 하지만 여름은 그렇지 않다.

 여름을 보내는 이들은 자기와 자기 아닌 것 사이의 얇은 틈을 보다 선명하게 느낀다. 그것은 빗물에 젖은 와이셔츠와 살갗 사이이기도 하고 더운 햇볕 아래 조금씩 면적을 늘려가는 등 언저리의 땀자국이기도 하다. 잘 벗어지지 않는 옷을 억지로 벗겨내려 노력할 때야 비로소 몸에 붙어 있던 몸 아닌 것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결코 개운하지 않은 느낌.

 억지로 벗겨내려 해도 몸에 남은 듯한 눅눅하고 차가운 기분.

 불쾌한 계절이라기엔 다소 아쉬운 감정.

 그러니 그날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다소 즉흥적인 제주도 여행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울퉁불퉁한 노면으로부터 전해 오는 엉덩이의 통증이었다. 지자체가 도로를 관리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몸소 체험해볼 수 있었다. 잠시나마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속도를 줄이고 나면 어느새 발목 만한 포트홀에 빠졌다 나온 한쪽 타이어가 엉덩이부터 두개골까지 이어지는 내 온몸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차를 빌릴 때부터 범퍼에 난 흠집을 모두 찍어두라던 친구의 조언은 바로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이었다.

 도롯가에 있는 목장 근처에서 회색 갈기를 흩날리는 흰 말의 몸통을 그저 감탄만 하며 보던 순간이었다. 여자 둘이서 온 듯한 일행이 빨간색 소형 SUV를 구석에 세워놓은 채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첫인상부터 별로였다. 보이시한 옷차림에 다소 선이 분명한 얼굴의 그녀는 보는 즉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 곁에 선 노란 원피스 차림의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손이 많이 갈 것처럼 보였다.

 “도와드릴까요?”

 “렌터카 업체에 전화했어요.”

 보이시한 옷차림의 그녀가 단번에 내 접근을 차단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건넸다.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한 시간 반은 걸릴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녀도 납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해는 섬 가운데 솟은 능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에 가든 보이는 저 산은 이 섬의 외로운 상징이기도 했다.

 “키는 차 안에 뒀다고만 알려주면 그쪽에서 알아서 할 거예요.”

 “성현아, 너는 괜찮아?”

 손이 많이 갈듯한 그 여자의 이름은 성현이였다. 나는 보이시한 그녀의 이름을 듣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렌터카 업체에 다시 전화를 걸 동안 나는 원피스 차림의 그 여자와 함께 멀뚱히 차 옆에 서 있었다. 내 타깃은 아니었지만 예의상 말이라도 건네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혼자 오셨나 봐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직 렌터카 업체와의 대화는 끝나지 않은 듯했다. 관심이 없는 티를 너무 낸 건 아닌가 싶어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이서 오셨나 봐요?”

 “네.”

 이런 식으로 대답할 거라면 왜 먼저 말을 걸었는지 어이가 없었다. 이윽고 다소 열 받은 상태에서 통화를 마친 그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성산 일출봉 쪽인데 같은 방향이면 얻어 타도 될까요?”

 나는 서귀포로 가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혼자서 온 터라 숙소로 일찍 돌아간다 해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숙소에 짐을 풀고 왔기에 각자가 들고 온 건 핸드백 하나씩밖에 없는 듯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뜨겁게 달구어진 승용차를 잠시 식히고 두 사람이 기다리는 SUV 옆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조수석 문을 열더니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당연히 두 사람이 뒷자리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은 뒷좌석 손잡이를 쥐고 멍하니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보이시한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성현아, 너는 거기에 앉을래?”

 보이시한 그녀가 자기가 본 걸 그대로 믿지는 못하겠다는 듯 조수석에 앉은 성현 씨에게 물었다.

 “뒤에 앉으면 어지러워.”

 역시 손이 많이 가는 여자가 맞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그녀와 내 눈이 잠시 마주쳤다가 이내 서로를 외면했다. 왠지 그녀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길이 조금 험할 수도 있어요.”

 “그럼 천천히 조심해서 운전해주세요.”

 뒷좌석에 앉은 그녀가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조수석에 앉은 성현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네.”

 덤터기를 쓴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핸들을 꺾었다. 조금씩 길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음에서 계속

이전 01화 쏟아지는 물줄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