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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y 04. 2022

엄마





 사랑한다는 말(A Word)



 24. 엄마



 장을 보는 부부들 사이로 카트 손잡이를 쥔 아이들이 마트 깊숙한 곳을 향해 사라졌다. 나는 일인용 바구니 하나를 들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야채 코너를 구경하고 있었다. 너무 큰 양파망과 마늘 봉지가 내 시선을 벗어나고 이내 낱개로 포장된 야채들이 보였다. 아이 손바닥만한 마늘 봉지와 한 개씩 진공 포장된 양파를 집어 든 다음 세 번은 나누어 먹을 만큼 커다란 샐러드 더미가 담긴 상자 쪽으로 이동했다. 그중 하나를 골라서 바구니에 넣은 뒤 무심코 버섯으로 손이 가다가 멈췄다. 저번에 사놨던 것이 조금은 남아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큰 브로콜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보다가 야채 코너를 벗어났다.

 한참을 서로 다른 사이즈의 계란 상자 앞에서 고민하던 찰나였다. 내 엉덩이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하는 키의 어린아이가 왼손에 든 바구니 옆에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눈빛을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끈질긴 녀석의 구애에 결국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 어디 갔어?”

 녀석에게 묻자 손을 들고는 수육용 돼지고기를 살피는 한 여성을 가리켰다.

 “엄마한테 가야지.”

 그래도 녀석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아이와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녀석이 내게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한테 갈까?”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돌아갈 거면서 나한테 오기는.

 한 손을 잡아서 어머니에게 아이를 데려다주고는 유제품 코너로 돌아왔다. 이제는 우유를 고르던 중 녀석의 얼굴이 생각나서 무심코 정육 코너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의 손을 쥔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다시 나를 발견하고는 시선을 맞추었다. 왠지 녀석에게 반가운 척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손을 흔들었더니 이번에는 나를 무시해버렸다. 어릴 때는 잘해줘도 소용없다더니.

 엄마라는 여자는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보다 한두 살 위일지도 모른다. 정혜의 아이도 벌써 어린이집에 들어갔다고 지혜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조금 뒤진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때에 맞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식상해 보이기는 해도 제일 나은 삶이 아닐까. 사교육비와 생활비에 쫓겨서 살아가는 것이 평범해 보여도 가장 괜찮은 삶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살다가 삶의 끄트머리에 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또 모르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 삶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모습이 아닐까.

 장을 보다 말고 나는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가격표를 유심히 살피며 먹을거리를 고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나도 저들 중 하나였고 저들과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았다.

 그래도 내 삶만큼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이 어디에 있을까. 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닌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새 아이는 엄마를 따라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찾아왔다 냉정하게 나를 버리고 간 녀석은 이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엄마는 행복할까. 어디엔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녀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을까. 그녀는 그것을 감사해할까 아니면 불행하게 여길까.

 셀프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고 카드를 밀어 넣으며 물건을 챙겼다. 미리 집에서 가지고 나온 다회용 쇼핑백에 샐러드 상자며 마늘이니 하는 것들을 담은 뒤 마트를 나섰다. 어두운 하늘 아래로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보이고 지나가는 차들 곁에 선 사람들은 더러는 혼자 더러는 남편과 아내가 손 하나씩을 나누어 쇼핑백을 쥐고는 길을 건널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쭈뼛거리며 다가가 그들 뒤에 섰다. 나는 그들 중 혼자 봉투를 든 사람에 속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가족이었다.

 덤덤히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두 정거장만 지나면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은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와 아이들에게로 옮아갔다. 어떻게 집을 장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에게는 집이 있었고 아이가 있었다. 성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선을 그을 수 없는 배우자도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저들 중에도 내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버스 안에서 그녀에게 오늘 장을 본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냈다. 자기 집에서 편하게 저녁을 대접받는 불효녀인 그녀는 내가 사 온 것들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는 듯했다. 이대로면 결혼해 살더라도 음식을 내가 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계속해서 넌지시 요리를 해보라 권하고 있지만 도통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름이에게 요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밥이 나오고 국이 나오는 생활에 젖은 그녀를 어떻게 바꿀 방법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부엌일을 시작했다. 아침에 물에 담가 둔 그릇들을 간단히 마무리하고 싱크대를 비웠다. 원룸에 살면 커다란 싱크대를 가지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품게 된다. 설거지할 그릇을 한쪽에 모은 동시에 다른 한 곳에서 채소를 다듬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어쩌면 결혼의 이유란 넓은 싱크대와 주방을 갖기 위함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멍청하게도 버섯은 없었다. 먹고 남은 것이 시들해져서 내다 버렸나 보다. 머릿속으로 저녁 식단을 수정하며 사온 재료들을 씻었다.

 이대로면 주방일 모두를 내가 하게 될 텐데. 겨우 설거지나 빨래 너는 것 정도만 하며 여생을 내게 맡길 아름이를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바로 손을 닦고 휴대폰을 켜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 엄마가 해주신 두부조림 맛있댔지? 그거 어떻게 만드는지 한번 물어보고 배워 와. 레시피도 적어 오고.’

 제발 아름이의 어머니가 내 깊은 뜻을 헤아려 그녀에게 요리를 가르치면 좋겠다. 간절히 기도하며 다시 고무장갑을 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푸념을 하며 나 혼자서 먹을 저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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