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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y 06. 2022

서로의 순간





 사랑한다는 말(A Word)



 25. 서로의 순간



 “커피?”

 “사 놨지.”

 컵 홀더에 끼워놓은 종이컵 두 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카페인 있는 거?”

 “물론이지.”

 그녀가 뚜껑을 열고 한 입을 마시더니 이제야 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그렇듯 그녀는 벨트를 바로 매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는 조수석 벨트를 제대로 매라며 경고음을 울렸다. 귀찮다는 듯이 그녀가 벨트 끝을 잡아당길 동안 나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편하게 옆자리에 앉아서 한가로이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는 그녀가 부러웠다. 운전도 가르쳐야 하는데 도통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리도 안 하고 운전도 안 하고 그냥 얹혀살겠다는 말이 아닌가. 다시 어제의 울분이 올라왔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월급만 받으며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저주하며 고속도로로 차를 올렸다.

 우리의 차는 굽이치는 산들을 지나 끝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경기도를 벗어나자 한눈에 보일 정도로 큰 공장들이 사라지고 한적한 시골과 낮은 아파트, 이따금 나타나는 강과 논밭의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일부러 강이 보이는 다리를 지날 때마다 조금 속도를 늦추었고 그녀는 그런 틈을 이용해 창밖으로 흔들리는 물결을 보았다. 강줄기 옆으로 갈밭이 흩어지고 나면 다시 이어진 밭들 사이로 무나 배추가 심긴 풍경이 펼쳐졌고 채소의 명칭을 모르는 그녀는 관심이 없는 티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녀는 그때에만 고개를 끄덕일 뿐 한눈에 무밭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참을 달린 우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기지개를 켤 동안 나는 선 채로 양팔을 뻗어 내 발등을 찍어보려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것도 안 돼?”

 그녀가 내가 하려던 동작을 시범 삼아 해 보였다.

 “필라테스할 때 하는 동작인가?”

 “코어 운동을 해야 한다니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휴게소 건물을 향해 걸었다. 몇 번을 더 해보았지만 역시 잘되지 않았다. 편하게 사는 사람은 계속 건강하게 살고 불편하게 지내는 사람은 계속 일하며 건강을 해쳐야 하는 부조리함을 생각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적당히 볼일을 마친 뒤 손도 씻지 않고서 화장실을 나서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드라이어에 손을 말렸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무슨 자세야.”

 “오빠 기다리고 있었지. 왜 이렇게 늦어.”

 핫도그와 통감자, 옥수수와 호두과자가 즐비했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못내 아쉬운 마음에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그대로 손을 잡고 차로 돌아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연기가 싫다며 그녀는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만 잠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졸음을 쫓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이 계속해서 귓등을 울렸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잠시나마 멈추어 숨을 돌리고 있었다. 이 찰나의 순간이 기억으로 남아 추억이 되고 또 잊힐 것이다. 나는 그녀와 내 생활을 이루고 있는 신비한 힘을 생각했다. 삶은 알지 못하는 순간마다 가끔씩 나를 찾아왔고 이렇게 하던 일에서 벗어나서 나를 돌이켜 보게 했다. 여기에는 강물도 없고 하늘에는 구름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어딘가로 흐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멈추어 보내는 이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언제 갈 거야.’

 휴대폰을 보자 아름이가 내게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아니 말로 하면 될 걸 메시지로 보내?”

 “귀찮아.”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창문을 내리며 대답했다.

 “잠깐 쉬고 있는데 너무 좋았어. 여유로우면서도 아쉬운 거야. 이 시간이 이렇게 지나면 또 언제 오려나 싶더라고.”

 “다음 휴게소 때 오겠지.”

 “그런 말이 아니고. 그리고 다음 휴게소는 없어. 바로 순천만까지 갈 거야.”

 “한 번에?”

 “그럼. 쉬기에는 조금 애매한 거리라서, 혹시 모르지. 내키면 중간에 한 번 더 쉬지 뭐.”

 “나도 운전을 배울까? 혼자 운전하니까 피곤하지.”

 “말만 그렇게 하고 안 배울 거면서.”

 “잘 아네.”

 거짓말을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가 창문을 올렸다. 자리에 앉아 시동을 건 내가 천천히 차를 뒤로 뺄 동안 그녀는 듣고 싶은 다음 노래를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순천만을 향해 한참을 또 달렸다.

 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아까의 순간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긴 여행 가운데 잠깐의 여유,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젖는 순간의 무의식과 눈 앞에 펼쳐진 듯한 생소한 풍경. 그녀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기 전까지 나는 어떤 기분에 사로잡혀 그곳에 없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내 앞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이기도 했지만 바삐 움직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 감각들 가운데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온함에 잠겨 있었고 내가 출발한 곳도 가려는 곳도 잊은 채 가만히 하늘과 산과 건물 사이의 어디쯤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은 살아오며 처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추상적인 기분 말고는 구체적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나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나 더 겪었겠지만 또 잊은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이전의 감정 위로 한 겹의 천을 덧대는 것처럼 기억이나 추억 또한 그렇게 새로운 것으로 가려지게 된다. 모든 것이 새로운 일처럼 느껴지지만 이미 예전의 내게는 찾아왔다가 사라진 무엇이리라. 나는 또 잊고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낯설게 여기며 마음에 한 장면을 새로이 기록해갈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이었다. 어쩌면 나이가 지긋한 이들이 즐겨 쓰는 인생이라는 단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삶에는 배우자라 하더라도 나누어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가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그녀에게도 내가 모르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고요를 깨뜨리는 한 사람과 살고 있었고 그 삶의 균형은 흩어지고 모이는 것들의 어느 한 가운데에 있었다. 비록 우리는 서로의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만 그나 그녀 자신은 아는 것이다. 나지막히 떠오르는 한 시절이 있음을, 내가 누구의 무엇도 아닌 그저 하나의 존재로만 고적히 존재하는 한 때가 있었음을.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안고서 마치 한 삶인 것처럼 서로의 곁을 지키며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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