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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y 11. 2022

그 말





 사랑한다는 말(A Word)



 27. 그 말



 “잠깐 쉬다 가자.”

 작은 언덕배기를 오르더니 이내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공기는 차가워지고 있었다. 하늘 가운데로 점점 붉은 기운이 얼비치기 시작했다.

 “업어줄까?”

 “사람들 보는 데서 뭘 업어.”

 그녀가 웃으며 다시 앞장섰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언덕 아래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잠깐의 내리막을 즐겼다.

 “공원을 걸을 때랑 기분이 다르다.”

 “등산도 괜찮을 것 같아.”

 “요거 오르고 등산할 마음 먹으면 큰일 나지.”

 “아니 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친구들과 야간 산행을 간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같이 도착한 태백산 초입에서 우리가 목격한 장면은 거대한 버스 몇 대가 쏟아내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값비싼 장비로 중무장한 그들은 겨우 끈으로 동여맨 헤드라이트와 형편없는 품질의 아이젠을 낀 우리의 기를 죽였다. 인터넷으로 산 조그만 헤드라이트의 불빛은 그들이 쏟아내는 엄청난 빛의 분수에 가려 티도 나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들 사이에 끼어 간 탓에 사실상 환한 대낮의 길처럼 산을 오를 수 있었고 이따금 쉴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별들 가운데 별을 찾을 수 있었다. 별은 언제나 별들 사이에 있었고 그 별은 또 다른 별과의 사이에 작고 새로운 별들을 남겨놓았다. 별 사이의 별이 끝없이 이어진 탓에 나는 그 끝을 짚으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말았고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산을 올랐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탓인지 아직 경사를 오르는 중인데도 꼭대기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먼 산 위로 떠오른 해를 구경만 해야 했다.

 “야간 산행 가볼래?”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 말고도 오는 사람이 많아서 괜찮을 거야. 새벽마다 버스가 와서 사람들을 쏟아내고 가거든.”

 조금 더 편한 여행을 생각하던 그녀가 잠시 고민할 동안 우리는 어느새 전망대의 끝에 도착했다. 붉게 물든 강줄기 사이에는 우리가 지나온 갈밭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가는 자리마다 갈대는 누워서 그곳을 가리키고 강물은 앞뒤로 흐르며 가만히 멈춰선 이들의 시선을 흔들었다. 산 너머로 잠기는 해가 마지막 빛을 남빛의 어둠 위로 뿌려댈 동안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어렸지만 마치 나이가 든 부부처럼 지는 해를 지켜보았다.

 “춥다.”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손 말고 옷을 벗어 줘.”

 “안 돼. 나도 추워.”

 다시 옥신각신하며 추위를 떨쳐내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걸어온 아이가 우리의 곁에 서 있었다. 녀석이 그녀를 쳐다볼 동안 나는 마트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그녀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섰다.

 “내가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아. 잘 봐.”

 하지만 녀석은 내 눈을 피해서 계속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혼자 있어?”

 내 말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길을 잃은 거야? 엄마 아빠랑 같이 왔어? 엄마는 어디에 계실까?”

 그녀가 자세를 낮춰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다정히 말을 건넸다. 내게는 대답도 하지 않던 녀석이 거짓말처럼 그녀에게는 입을 열었다.

 “엄마.”

 역시 녀석은 아빠를 찾지 않았다. 아이들은 항상 엄마만 찾고 아빠는 찾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들은 이게 모두 당신이 아이에게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이라고 쏘아붙인다. 아빠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얘 엄마를 찾아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찾아 주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노을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전망대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가 아이의 손을 잡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아이의 부모를 찾을지 난감했다. 누구 하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 그들도 노을과 갈밭이 만들어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잠시 오늘을 잊었으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전망대의 가운데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아이의 눈길을 따라서 녀석의 부모를 어림짐작해보려는 듯했다. 그 뒤를 따르는 내게로 그녀가 말했다.

 “기다려 봐. 애기 엄마를 찾아 주고 올게.”

 “같이 안 가?”

 “오빠는 여기에 있어.”

 그녀가 나를 두고 가는 동안 나는 그 둘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손을 잡고 선 그녀가 이제는 아이의 손을 쥐고 걷고 있었다. 잠시 뒤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 남자 하나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뒤로 다급한 걸음의 여자 하나도 보였다. 그들은 아이의 손을 쥔 그녀에게는 별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아이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남자가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아이의 엄마는 여전히 아이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마주 인사를 하고 내 곁으로 돌아왔다.

 “성공.”

 “애기 엄마는 고맙다고 인사를 안 하네.”

 “아니야, 했어. 맨 처음 애기를 보자마자 바로 고맙다고 했어. 자기도 정신이 없었을 거야.”

 그렇게 쉽게 그 일을 지나 보내고 그녀는 다시 노을을 향해 눈을 돌렸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만 보였다. 붉은빛으로 물든 그녀의 볼과 귓가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새 빛은 천천히 사그라지고 어둠이 강 끝에서부터 갈밭으로, 갈밭에서 산으로 자신의 점령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가 소멸하는 모습을 덤덤히 지켜보았다.

 아이는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부모들도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녀 역시 오늘을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선 그녀의 모습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뭇잎과 가지, 강물과 갈대를 비추던 빛이 사라질 동안 우리의 곁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 아이와 다시는 오지 않을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그녀에게 할 말을 생각해냈다. 그 말은 오늘이 지나면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말은 매일같이 해줄 수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이어야만 진실하게 들릴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도 실낱같이 새어 나오는 빛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곳은 어두웠지만 아직 빛이 가시지 않은 곳이었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아직은 우리가 견딜 수 있을만한 시간이었다. 모르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 모두가 곁에 남은 한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쳐다볼 필요가 없었고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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