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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y 09. 2022

갈대





 사랑한다는 말(A Word)



 26. 갈대



 그녀가 짐을 풀 동안 나는 화장실을 확인했다.

 “수건은 챙겨왔어?”

 원래 있던 흰 수건들을 빼내고 그 자리에 그녀가 가져온 수건들을 올려놓았다. 샤워 부스에 세워진 샴푸와 린스를 보자마자 내가 그것들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네 꺼 써도 되지?”

 “비싼 건데. 내가 특별히 허락해 줄게. 저번에도 안 들고 온 것 같은데.”

 “그랬나?”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에는 내 가방을 열었다. 면도기와 클렌징 폼, 칫솔을 꺼내서 화장실 선반 위에 늘어놓았다. 옷장을 열자 자그마한 여행자용 금고가 보였다.

 “금고를 쓸 일이 있을까?”

 “어차피 다 가지고 다닐 건데.”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온 바람막이를 옷걸이에 걸쳤다. 바지를 입고서 침대에 눕기는 좀 그렇다는 생각에 잠시 방 한쪽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대충 짐 정리를 마친 그녀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고 나도 그녀를 따라서 그 곁에 누웠다.

 “좀 잘래? 피곤해 보이는데.”

 “해가 지기 전에 가 봐야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아까 차에서 많이 잤어.”

 “그럼 잠깐 혼자 놀고 있어.”

 그녀가 휴대폰을 볼 동안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가을에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우리도 숙소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차에서 확인한 오늘의 일몰 시각이 몇 시였는지를 생각하던 중 깜박 잠이 들었고 이내 눈을 떴다. 그동안 그녀는 같은 자세로 누워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꼼짝도 않고 누워있을 수 있지?”

 “집에 가면 종일 누워있거든. 그럼 동생이 들어왔다가 흠칫 놀라면서 나간단 말이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꼼짝 않고 있냐면서.”

 혀를 차며 일어나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발랐다.

 “선크림을 발라야겠지?”

 “발라줄까?”

 재미있는 일을 찾았다는 듯이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자기가 쓰던 황금빛 튜브를 가방에서 꺼내더니 손등에 한 움큼 짜내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찍어서 내 얼굴에 한 점씩 묻히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에 안 묻게.”

 “알았어.”

 이마와 볼, 콧등과 턱에 묻은 선크림을 손으로 문지르고는 그녀가 내 이마를 딱하고 때렸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튼 나갈 준비를 해야 했기에 우리는 다시 부산을 떨었다. 물을 가져가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가는 길에 사자고 했지만 역시 내 말을 흘려들으며 그녀는 물병을 챙겼다. 가서 먹을 것이 필요하다며 새파란 귤 봉지를 떠넘기는 바람에 그걸 드는 것은 내 몫이 되어 버렸다.

 “선글라스를 들고 가는 게 좋겠지?”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역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선글라스 케이스마저 챙겼다. 더는 들고 갈 것이 없어진 그녀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확인할 동안 나는 신발장에 붙은 거울 앞에서 머리의 가르마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당겨 말릴 것을 그랬나.

 우리는 차를 타고 순천만 습지로 향했다. 몇 채의 음식점과 펜션을 지나치자 나란히 선 관목들과 넓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내 가슴팍 사이를 들추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란빛이었고 그녀는 차 안에서 마지막 화장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누구 보여주려고 그래.”

 “오빠 좋으라고 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보기에 제 얼굴이 예뻐 보여야 했다. 지난 삼 년간 살펴온 저 화장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은 내게 잘 보이려는 거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에 나가든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경계에는 속해야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사람들을 보고 다니는 입장이었지 그들이 날 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을 쓰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녀일 것이다. 외적인 것보다도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처럼 여겨질지가 신경 쓰였다. 어쩌면 이 또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서 습지로 향했다. 생태체험관 건물을 지나쳐 긴 통나무 길로 이어지는 아치형 다리를 건넜다. 꽤 많은 이들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고 이미 끝을 찍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우리는 무심코 그들을 피해 걸었고 어느덧 습지의 한 가운데로 접어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엇이든 그녀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것은 풍경이거나 소음이거나 사진을 찍는 커플이거나 우리의 곁을 지나치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도 적당히 받아쳐 주었다. 그녀도 알 것이다. 이 습지가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친구가 권유해서 왔지만 결국 누구와 오느냐가 더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어쩌면 이곳은 혼자라면 올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 공동의 사건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내 경험도 아니고 그녀의 경험도 아닌 우리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날의 풍경은 잊더라도 그날 내가 배가 고팠다거나 그녀가 찬 바람에 고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했다. 결국 가장 소중한 일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하늘과 시린 바람, 적당한 갈밭의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는 커플들과 운동 삼아 통나무 길을 오가는 등산복 차림의 이들은 우리 여행의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우리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공유한 감각과 감정, 함께 기억하는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고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들을 생각했다. 이제는 가질 수 없게 된 것들과 가지게 된 것들을 떠올렸다. 내 인생의 한 자락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지난 시간이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그립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우습게도 그런 결론을 내리며 나는 그녀와 함께 갈밭을 건넜다. 바람에 누운 갈대들이 계속해서 인사를 건네고 우리는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웃으며 전망대로 향하는 언덕을 올랐다.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도 그것은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갈대가 너무 많아서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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