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몇 개월 전부터 타요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탈 것을 아주 좋아한다. 어린이집을 하원하고 나서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물어본다.
"아빠, 저건 몇 번 버스야?"
"아빠, 저거 03번 맞지?"
"레미콘, 엄청 커!"
가끔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과 겹칠 때 몇 번 버스정류장에서 아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아들은 그 시간이 참 좋았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귤도 먹고, 과자도 먹고, 물도 먹으면서 지나가는 자동차, 봉고차, 레미콘, 버스들을 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오늘은 엄마가 좀 늦으실 거 같아. 이제 해님 가고 달님이 올 거 같아. 우리도 집에 가야 해!"
"엄마, 아직 회사?"
"응! 집에 가서 기다리면 오실 거야!"
"7번 한 번만 보고, 집 가자!"
특히 03번과 7번 버스를 아주 좋아하는데, 아들은 세상에 널려있는 숫자들을 찾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나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편의점 앞 가판대의 숫자, 자동차 번호판, 과자 안의 숫자 등이 아들에게는 어찌도 그렇게 잘 보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들이 발견해 내는 숫자를 보면서 내가 지나쳤던 시선을 오늘도 한번 더 배운다.
그걸 보면서 숫자를 꼭 책으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 다니면서, 뛰어다니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숫자들이 우리 주변에서 나를 감싸고 있다. 우리가 눈길을 주지 않을 뿐. 의미 없어 보이던 숫자들이 아들이 보고 주목해 주는 순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어린이집 알림장을 보니 기저귀와 배변수건을 다 사용해서 보내달라는 알림을 확인했다. 베란다고 나가 기저귀를 가지고 들어와 기저귀에 반과 이름을 쓰려는 순간 아들이 나에게 말한다.
"아빠, 색칠 놀이하자."
"기저귀 봉투에?"
"응~"
"그러자, 그런데 봉지라 잘 지워질 수 있어!"
크레파스를 가지고 기저귀 봉투 위에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색을 칠하다가 본인이 생각한 대로 잘 안되었는지 방향을 바꾼다.
"아빠, 숫자 놀이하자"
"그래 그러자!"
"여기에도 03번 있어!"
"아 그래? 그러면 아들이 좋아하는 7번도 있는지 찾아볼까? 보자~ 여기에는 7번은 없네!"
"아빠, 여기 7번 있어. 7번 엄청 많아!"
아들은 '기저귀'라는 단어 중 '기'의 ㄱ, '12시간'이라는 단어 중 '간'의 ㄱ을 보고 7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순간 숫자는 숫자, 글자는 글자라고 생각하던 나의 고정관념이 아들의 말 망치로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들의 말 한마디에 모든 글자들이 숫자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들은 숫자 안에서도 또 다른 숫자를 발견하곤 했다.
"(8을 보며) 아빠, 여기 0이 두 개 있어."
"그러네 진짜! 신기하다!"
아들과 지내다 보면 얼마나 내가 어른이라는 육체로, 고정관념으로 세상의 것들을 구분하고 살았나 반성하게 된다. 나는 '이거는 무조건 이렇게, 저거는 무조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아집을 가지고, 그것에 어긋나면 막 불안해하지는 않았을까? 아들 덕분에 오늘도 잠깐 숨 쉴 여유를 가지게 된다. 고맙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