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체력은 점점 줄어드는데, 아들의 체력은 한계를 모르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몇 살이에요?” 라고 물어보면 몇 개월이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몇 살이에요라고 말하는 시기가 왔다. 그렇게 걸어다는 게 아직 어색했던 아들은 뛰어다니는데 어색함이 없는 상태로 변했다. 때론 본인의 에너지와 가속도에 감당이 안되지만 말이다.
신생아 때는 "이 시간이 언제 지나갈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무섭게 흘러간다. 그리고 2년 반 정도밖에 안된 아들이 이렇게나 커 있는 걸 보면서 때로는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2년 조금 넘은 아이와 이렇게 소통이 되고, 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는 게 때론 놀랍기까지 하다. 사실 그것보다도 나랑 너무 닮은 생명체가 나와 똑같이 행동하려고 한다는 게 재밌고 좋다가도 몰랐던 나의 행동을 거울 치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 내가 이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우리 서로 키우고 있는 중이구나."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하다. 어떤 하루는 아들과 내가 너무 애틋하다가도, 어떤 날은 신경전을 벌인다. 아내와 사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때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기까지 하다. 기억나지 않는 내 3세 시절이 저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하원하고 놀이터를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밥 먹기', '씻기', '이 닦이' 등의 큰 TO-DO가 있고, 그 사이에 시간들은 가변적이다. 그리고 필수로 해야 할 일을 해야 잠에 들 수가 있다. 사실 이 모든 사실은 나도 알고 있고, 아들도 알고 있다. 서로가 하고 싶은 타이밍만 다를 뿐. 그 타이밍을 맞추는 게 상당히 쉽지 않다.
나도 어릴 때 내가 밥 먹고 싶은 타이밍이 있고, 내가 씻고 싶은 타이밍이 있고, 내가 이를 닦고 싶은 타이밍이 있는데 꼭 그 타이밍 전에 엄마가 "이 닦아라~", "밥 먹어라~", "씻어라~"라고 하면 왠지 더 하기 싫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 기분을 아들이 느낄 거다. 어떤 날은 서로의 타이밍을 기다려주다 보면 아들이 먼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빠, 지금 씻어야 하지 않아?"
"아빠, 오늘 치카치카 안 해?"
그렇게 서로의 타이밍이 잘 맞는 날이면 모든 게 애틋하게 끝난다. 그런 날에는 서로 애틋하다 못해, 보지 못할 정도로 사랑 고백을 하고 잠에 들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하루하루가 이렇게 애틋하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는 날이면 과천동물원에서 본 뿔 달린 임팔라가 싸우는 것처럼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아빠 1시간 전부터 이야기했어! 이 닦으러 와!"
"안 가. 안 간다고 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상황이 너무 웃긴대도 웃지 못한다. 가끔은 진짜 화가 나기도 하는데 잠깐 뒤돌아서 생각해 보면 그 순간도 웃긴다.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내 무릎에 와서 이를 닦는 아들. 아들이 내 앞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 나 속상했어. 그래도 아빠 사랑해"
눈덩이처럼 쌓였던 마음의 근심과, 답답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녹아버린다. 아들과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부족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빠인 내가 조건 없이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들도 나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 있었구나를 느끼게 된다.
“그래. 아빠도 오늘 더 너의 타이밍을 맞춰볼게. 사랑한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