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라쌤 Oct 29. 2022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인간관계는 참 다양하다. 부모, 배우자, 자녀, 친구, 동료, 스승, 선후배 등 우리는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할 때, 나도 모르게 관계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간다'는 표현이 익숙하게 튀어나온다. 분명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괴로운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지기에 그런 것 같다. 그 괴로움이 가장 컸던 관계는 나에게는 부모였다. 그중에서도 바로 아빠다.


14살, 나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조손가정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전라도 깡촌으로 전학을 갔다. 순식간에 집 앞에 있던 롯데리아가 사라졌다. 이제는 아무 때나 라이스버거를 사 먹지 못했다. 그 대신 30분을 걸어야 나오는 정자 앞에 오래된 구멍가게가 유일한 슈퍼였다. 겉모습은 마치 유통기한이 1년 지난 라면을 팔 것처럼 으스스하게 생겼다. 


그러니, 음식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차려주는 대로 먹었다. 배추 된장국에 김치가 전부였다. 시골 생활 중 가장 서러웠던 건 학교에서 소풍 갈 때였다. 남들에게 소풍이란, 새 옷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나는 소풍이 몹시 싫었다. 김밥 싸줄 사람이 없어서였다. 소풍 갈 때마다 윗집 아주머니에게 김밥을 싸 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 화려한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게 김치와 쌀밥만 가져가긴 죽어도 싫었기에 매번 부탁했다. 엄마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고 윗집 아주머니가 싸주시는 김밥을 들고 소풍을 갔다. 할머니는 고구마며 고추며 막 수확한 농작물을 고맙다는 의미로 그 집에 가져다주었다. 명절 때마다 내려오는 아빠는 신라면 두 박스를 사들고 그 아주머니에게 우리 딸 잘 봐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그 장면이 죽을 만큼 싫었다. 할머니와 아빠가 굽신거리는 모습이 꼭 내가 짐이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어느 날은 티브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라이스버거 광고가 나왔다. 김치가 들어간 라이스버거가 새로 나왔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햄버거다 햄버거! 먹고 싶다" 햄버거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버럭하고 소리를 치셨다.

"아잇! 너는 어째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냐잉. 힘들게 돈 버는 아빠를 생각해야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혼잣말도 마음대로 못하며 남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 후, 혼자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그날 할머니와 봤던 햄버거 광고가 또 나왔다. 그 광고를 본 순간 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5분여를 콧물까지 흘리며 펑펑 울었다. 혼자 있으니, 그동안 서러웠던 마음이 터진 것이었다. 혼자 감내해야 했던 슬픔들이 그렇게 쌓이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었다. 고요한 시골 마당에 차 한 대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빠 차였다. 조수석에서 낯선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이 날만큼 하얀 투피스 정장을 입었다. 하이힐에 롱코트를 입은 모습이 마치 비닐하우스 지붕에 소복소복 쌓인 하얀 눈 같았다. 시골에 내리는 눈은 참 깨끗하고 예쁘다. 그녀도 눈처럼 예뻤다. 키도 컸다. 아빠는 곧 결혼하게 될 그 여자라며 할머니에게 소개해주었다. 함께 밥을 먹은 뒤, 아빠는 나를 작은 방으로 불렀다. 아빠보다 11살이나 어린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강요했다. 처음 본 여자 게다가 새파랗게 젊은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라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아빠는 대답하라며 호통을 치셨다. 사춘기인 내게 뭐가 필요한지, 뭐가 힘든지 물을 생각도 않으시고 아빠는 늘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셨다. 본인이 원하는 것만 나에게 말씀하시곤 그날 밤, 아빠는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나는 아빠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윗집 아주머니도 있었지만 외톨이였다. 이제는 새엄마도 생겼네. 내 주변에 누군가가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도 내 외로움은 더 짙어져 갔다.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늘어가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입학한 후, 아빠와 새엄마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 예쁘던 새엄마는 아이를 낳고 다른 여자가 되어있었다. 눈처럼 하얗던 얼굴엔 기미가 가득하고 출산 후 살이 찐 몸매는 더 이상 키 크고 세련되어 보이는 여자가 아닌 우울하고 덩치 큰 아줌마로 변해있었다. 당구장을 하던 아빠는 밤마다 출근을 하셨다. 아빠가 없는 밤이면 밤마다 그녀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미친 여자로 변했다. 술에 취하면 나를 붙잡고 신세 한탄을 했다. 우리 아빠를 만나고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고 했다. 아빠를 닮은 어린 아들도 꼴 보기 싫다고 했다. 상태가 심한 날은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죽는다고 소리를 쳤다. 내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내 옷을 찢기도 했다. 가장 심했던 날은,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아이를 화장실 변기에 넣으며 죽으라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밤마다 고통스러웠다. 달리 갈 때가 없었기에 매일 밤 이불 안에서 숨죽이며 오늘은 제발 그냥 지나가기를 빌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녀는 아침이면 멀쩡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밤새 일을 하고 들어 온 아빠에게 새색시가 되어 아침상을 준비하고 그때 시골에서 봤던 그 여자처럼 웃으며 아빠를 맞이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미친 여자 옆에 있다가 내가 미쳐갈 지경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막 성인이 된 내가 판단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 번째로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아빠는 궁금해하거나 관심 주지도 않으셨고, 두 번째로 내가 말한다 한들 이 말을 믿어줄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아빠가 또 이혼할까 싶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엄마의 눈치, 아빠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4년이 넘는 시간을 끙끙대며 지냈다. 그러던 와중에 친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같이 살자는 제안에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의 그늘 아래 있었다. 내 무의식 속에 아빠는 늘 잘해드려야 하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명절 때마다 만나는 친척 어른들은 아빠에게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 또한 아빠가 불쌍한 사람이니 네가 이해하고 잘해주란 말씀을 하셨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아빠에게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엄마의 집에 살면서도 아빠가 부르면 달려갔고, 아빠가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생일 때마다 전화를 드리고 종종 안부를 물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빠는 나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어 취업한 나에게 그동안 나를 키워 준 비용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황당했다. 당연히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보답하는 게 도리지만, 일언반구 없이 계좌번호를 보내며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얼마나 힘들면 그러실까 동정심이 올라왔던 나는 또다시 나를 돌보지 못하고, 바보같이 행동해버렸다. 그러자 아빠의 무리한 요구는 계속되었다. 나에게 호의이자 도리였던 행동이 상대방에겐 기대감과 당연한 보상심리로 작용되었다. 나는 아빠의 연락이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그때, 내 상처를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행동이 우리의 관계를 더 어긋나게 한다는 것과 회복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딸로서 당연히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힘겹게 뒤로 한 채, 나는 아빠를 수신 차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돌보니 오래된 상처에 피딱지가 덕지덕지 굳어있었다. 그동안 혼자 속으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내가 참는 것이 능사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든 무덤이었다. 얼마나 힘든지 모른 채, 물리적으로 도움을 준 것을 보상받으려는 아빠를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락을 멀리 한 뒤에도 내 마음에는 묵직한 돌덩이가 있었다. 도저히 없어지지 않는 통증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아빠를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일 때 전화를 안 드리면 서운해하실 텐데, 당뇨 합병증으로 아프시다는데 걱정이 돼서 어떻게 하지. 나는 아빠가 신경 쓰였다. 아빠가 밉고 용서가 안되는데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애증의 관계처럼 양가감정이 느껴졌다.


이 괴로움의 원인은 아빠를 용서하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 이빠를 용서하지 않으니 그 상처가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나를 치유해야만 했다.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내 안의 상처 투성이인 작은 아이를 바라봤다.  





잔뜩 웅크리고 울고 있는 아이.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어 계속 작아졌던 아이가 있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김밥 싸 달라고 쭈뼛쭈뼛 말하는 나, 햄버거 먹고 싶다고 중얼거렸을 때 할머니의 버럭 하는 소리에 놀랐던 나, 매일 밤 새엄마에게 시달리면서도 힘든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내가 보인다. 너무도 작은 아이가 아빠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창살이 처진 감옥 안에서 내내 소리치고 있다.

 

'아빠 나 너무 힘들어. 도와줘. 아빠 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제발 들어줘. 나한테 왜 호통치는 거야. 나 무서워. 나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아빠.' 


아픈 아이를 바라보니, 그 아이는 아빠에게 많이 의지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딱 그 마음만큼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 아픔을 다 털어 내고 나니, 이제 아빠를 용서할 수 있다. 이번에는 열 걸음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빠를 바라본다. 


'나는 아빠밖에 없다. 아빠에게 의지하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을 들어주지 않는 아빠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내 상처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는 모른다. 아빠가 모르니,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아빠에 대한 원망은 애증이었다. 애증은 내가 만들었다. 비로소 애증은 이해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해는 수용이 되었다. 이런 글을 봤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누구에게나 인생은 처음이다. 처음이라 허둥대며 배워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게다가 부모와 자식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상처도 다른 관계보다 더 많이 받는다. 


아빠는 아빠가 처음이니 힘들었겠지?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잘 모른다.

나도 딸이 처음이라, 잘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자신도 모른다. 


여기까지 오기에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빠를 미워하는 만큼 참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있다. 아픈 시간이 길었던 만큼 치유의 시간도 길게 필요할 것이다. 조급하지 말자. 그러다 또 내 마음이 아플지 모르니까. 내 마음이 말하는 소리를 나 스스로 들어주며 천천히 가자. 아빠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까지 경험했던 어려움은, 이제 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제는 아빠에 대한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마치 내가 더 어른인양 아직 세상살이에 서툰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마저 든다. 멀리서나마 아빠가 건강하기를 바란다. 아빠가 평온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견뎌주고 큰 결정을 해준 나에게 정말 감사하다. 





저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이 참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것 역시도 남의 눈치를 보고 있었더라고요.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보려고요. 이타적인 마음을 내려면, 가장 먼저 내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혹시, 당신도 부모에게서 받은 큰 상처가 있나요? 더 늦지 않게 조금씩 털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니, 서로를 이해하면서 서로의 등대가 되어주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제 모든 진심을 담아 상처받은 분들의 마음에 위로를 보냅니다. 


이전 01화 김치볶음밥도 못하는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