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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쌤 Oct 09. 2022

김치볶음밥도 못하는 엄마

해외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대부분 있을 것이다. 특히 나는 외항사 승무원으로 합격한 후, 자카르타에서 교육을 받던 6개월 동안 한식이 더욱 생각났었다. 승무원으로 정식 비행을 하기 전, 비행기 기종에 대한 이론 수업 이외에도 안전 교육과 실습 비행을 한다. 22명의 한국인 동기들은 다 함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같이 버스를 타고 트레이닝 센터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한다. 숙소로 돌아오면 늦은 오후가 된다. 저녁 식사는 회사에서 제공되는 식당 쿠폰으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향신료가 들어간 외국 음식을 매일 먹기란 매우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제외한 동기들 몇몇은 엄마가 택배로 보내주는 한국 음식들로 저녁을 먹곤 했다. 친한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차려 먹었다. 자카르타에도 한국 슈퍼가 있었지만 부모님이 직접 보내주신 김치를 비롯한 여러 반찬의 맛은 공장에서 나온 제품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종종 그 무리에 껴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에서 보내준 음식이 얼마나 귀했던지 먹고 남은 라면 국물도 그냥 버리지 못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만든 짜파게티 볶음밥이다. 짜파게티를 먹고 남은 자박한 양념에 잘 익은 파김치를 달달 볶은 뒤, 밥을 넣으면 그야말로 맛이 기가 막혔다. 나의 파김치 짜장 볶음밥 맛에 감탄한 동기가 비법을 물어봤다. 음식은 무조건 볶으면 맛있다는 말에 그녀는 나를 "볶미라"로 불렀다. 타지에서 힘든 기간을 함께 이겨내는 동기들과 먹는 한식 차림 저녁은 마치 마른 사막에 오아시스 같은 달콤한 행복이었다.


우리의 한식 사랑은 비행을 하면서도 계속되었다. 대부분 한국 노선을 타며 비행했던지라, 기내식 메뉴는 늘  같았다. 불고기와 비빔밥이 번갈아 가며 나왔다. 몇 개월 동안 같은 메뉴에 질린 우리들은 비행 중에 먹을 음식을 따로 가지고 왔다. 나는 대부분 공항에 있는 식당이나 편의점을 자주 이용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나 김밥을 구매했다.


그런데 교육생 때부터 음식을 챙겨주시던 동기의 엄마들은 이 때도 남다른 사랑을 보여주셨다. 딸이 비행 가는 날에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대부분 메뉴는 김밥, 유부초밥, 김치볶음밥 같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중 어떤 엄마는 비행하는 동기들이랑 나눠먹으라고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시는 엄마도 계셨다. 


그런 동기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나도 정성 담긴 음식이 먹고 싶었다. 비행 가기 전 어느 날, 엄마에게 김치볶음밥을 해달라고 말했다. 엄마는 흔쾌히 알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엄마의 다음 물음에 기가 찼다.




"그래. 김치볶음밥? 근데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니?"


순간 나는 당황했다.

'김치볶음밥도 못하다니. 말이 돼? 해주기 싫어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엄마가 즐겨 드시는 음식이 아니다 보니 그럴 수 있겠다마는 용기 내어 부탁한 나에게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날 출근길은 무척이나 서러웠다.


'나도 엄마가 싸 준 도시락 먹고 싶은데. 누구에겐 쉬운 일들이 나에겐 참 어렵네.'


엄마의 사랑을 받는 동기들과 자꾸만 나를 비교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부터 나는 줄곧 내면에 다정한 엄마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하교 후 늘 혼자 집에 있었다. 직접 밥을 해 먹고 티브이를 보며 숙제를 하다가 잠드는 게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중 한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2층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 통증 때문에 도저히 걷기가 힘들어, 엄마가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셨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서 엄마는 물었다.


"미라 네가 지금 몇 학년이지? 몇 학년 몇 반으로 가야 하니?"


아무렇지 않게 묻는 엄마의 당당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몇 학년인지조차 모르던 엄마의 무관심이 내 가슴에 짙은 멍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내가 직장인이 된 이후까지 서운함과 부러움이 가슴 한편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몇 년 전, 함께 비행했었던 동기와 만난 적이 있다. 앞에서 말한 정성 다해 도시락을 싸주시던 엄마를 둔 동기였다. 그녀는 엄마에게 갱년기가 찾아와서 힘들다고 했다. 몇 달 내내 새벽마다 잠이 안 오신다며 친구에게 울면서 전화를 하셨다. 주체할 수 없는 갱년기 우울증에 가족 모두 힘든 시간을 겪고 있었다. 다정하던 엄마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친구에게 의존하는 것이 버겁다고 말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연세가 비슷해서 우리 엄마도 갱년기가 곧 올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왜 갱년기가 안 오냐고 물었다.


"안 오긴 왜 안 와. 말도 못 하게 땀이 나고 잠도 안 오고 아휴 말도 마. 아직도 힘들어."


아뿔싸. 엄마는 이미 갱년기를 겪고 계셨다. 성격이 외향적인 엄마는 마음이 우울해질 때마다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산에 가시거나,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며 나름의 투혼을 하고 계셨다. 몸의 변화를 감추며 스스로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듣고 보니, 한 겨울에도 얼굴에 땀을 흘리며 손 부채질을 연신 해대던 모습과 새벽에 거실 밖으로 들리던 티브이 소리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 또한 엄마에게 무관심했구나. 그동안 엄마에게 내가 느낀 섭섭함만 토로했는데, 엄마는 내게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를 보며 '힘들 땐 기대도 되지 않나' 하는 안쓰러움과 엄마를 돌보지 못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동기들의 엄마와 내 엄마를 비교하며 부러움이 올라왔다.

→ 엄마가 해주는 김치볶음밥을 기대했더니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 서운함은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펼쳐내며 엄마를 미워하는 감정까지 만들어냈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내 생각에 있었다. 부모님은 당연히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정작 나를 위해 맞벌이를 해야만 했던 고생스러움과 나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혼자서 갱년기를 견뎌내는 엄마의 강인함은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은 관계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켰다. 관계에서 나의 감정과 생각 속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내게 김치볶음밥을 해주어야 할 의무도 없고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알지 못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친밀한 마음이 클수록 감정을 객관화시키기 어렵다. 어려울수록 더 자주 그리고 조금씩 연습해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관계에 대한 불편함을 제가 만들었으니, 

관계에 대한 평온함도 제가 만들 수 있어요.


관계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나니 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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