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 빠지고, 금세 식었다. 그땐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오늘도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일어나 요가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발리의 자유로움에 불안하고 두려웠던 내 마음도 조금씩 잔잔해지고 있었다.
숙소 앞에 아사이볼 맛집이 있다고 해서 조식을 먹으러 갔다. 메뉴를 기다리는데, 오토바이를 탄 유럽 남자가 들어왔다. 덩치 큰 리트리버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라와 내 시선을 끌었다. 내가 쳐다보자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나와 눈을 맞추다가 나에게 오고 싶어 눈치를 보는 듯 주인을 번갈아 쳐다보길 반복했다. '와, 저 리트리버 너무 귀엽다.'라는 생각도 잠시, 남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앗!? 예전에 썸 탔던 남자와 너무 닮았다.
그의 이미지가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10년이 지나도, 사람의 얼굴과 분위기를 기억해 내는 나 자신이 놀랍기도 했다. 승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동료와 발리로 비행을 왔다. 마침 주말이라 화려하게 꾸미고 클럽에 갔다. 그곳에서 자카르타에서 휴가 온 남자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훤칠한 키와 이국적인 비주얼, 말도 안 되게 잘생긴 한 남자에게 눈이 갔다.
힐끗 쳐다보다 말았는데, 잠시 후 그의 친구가 내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도 둘, 우리도 둘. 게다가 전부 싱글.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심지어 우리 모두는 자카르타에 산다는 공통점까지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이런 게 운명적인 만남일까?'
넷이 함께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발리의 밤, 낯선 설렘 속에 취해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혼혈이었지만 영어가 서툴렀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친구를 통해 전해야 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는 자카르타에서도 몇 번 만났지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났다. 아쉬웠다. 사랑이란 감정보다는, 영화처럼 이어지지 못한 서사에 아쉬웠던 것 같다.
회상해 보니, 내 20대의 연애는 요즘 말로 ‘금사빠 금사식’이었다. 금세 사랑에 빠지고, 금세 사랑에 식는 사랑.
잘생겼다 → 좋아한다
부유하다 → 끌린다
잘해준다 → 사귀자
이런 패턴이었다.
한 번은 송중기 닮은 잘생긴 연하와 사귄 적이 있었다. 집도 부유했고, 키도 컸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격지심이 깊은 사람이라 나에게 ‘순종’을 요구했다. 비행을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된 몸으로 호텔 침대에 쓰러지기 전 연락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새벽에 로비에서 통화를 하는데, 조용한 내 목소리를 듣고는 “지금 나 몰래 클럽에 있는 거 아냐?”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그에 대한 마음이 확 깨져버렸다. ‘아, 이 사람은 내가 노력해도 믿질 않는구나.’
그보다 앞선 연애도 다르지 않았다. 듬직한 공무원, 나를 아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가고, 평소에도 모임이 많았던 그의 자유로움에 지쳐버렸다.
사업가도 있었다. 능력 있고, 리더십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쁜 일정에 약속을 쉽게 어기고, 나에게 늘 이해만 바랐다. 일정도, 대화도, 감정도 모두 그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에게 우선순위가 되지 못해 외로웠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빠지고 쉽게 식었을까?
이제야 안다. 상대방 전체를 보는 게 아니라, ‘장점 하나’를 보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잘생김, 능력, 배려 하나. 그 한 가지에 매혹돼 연애를 시작했고, 단점 하나가 보이면 그때부터는 머릿속이 바빠졌다.
“이 사람 앞으로 더 힘들게 하면 어쩌지?”
혼자 상상하고 불안해하고 방어막을 쳤다. 그리고 도망치듯 헤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사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서’ 연애를 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면,
“봐, 나 괜찮은 사람이잖아.”
“이만하면 나도 매력 있지.”
그 확인이 좋았다. 내 존재감을 상대의 시선으로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늘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에 목말랐다. 그래서 기준 없는 연애를 반복했다. 마음이 고프면, 아무 음식도 맛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20대 연애는 어떤 모습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