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방어했던 마음이 처음으로 풀린 순간
발리에서 돌아온 후,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36도의 푹푹 찌는 한여름 오후 1시. 소개팅을 하기 위해 대학로로 가는 중이었다. 통이 넓은 여름 청바지에 편한 나이키 운동화, 그리고 얇은 반팔티 하나를 입었다. 화장은 거의 하지 않았다. 땀이 유난히 많아 더위에 약한 나는 여름 소개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옷차림보다 마음 상태가 더 무심했다. 소개팅 자리가 썩 내키지 않았으니까.
서른아홉.
이제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 감정을 쌓아가는 일이 참 벅차게 느껴지는 나이였다. 일과 휴식을 포기하고 시간을 내는 일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점점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주선자와 깊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상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얼굴도, 나이도, 직업도 몰랐다. 그냥 “한 번 만나봐,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 수락해 버린 자리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소개팅 제안조차 더 이상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한 마디로, 나는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를 만난 건, 여느 소개팅처럼 파스타를 파는 분위기 좋은 식당이었다. 먼저 와 있던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속으로 외쳤다.
“뭐야, 괜찮은데?”
내가 선호하는 남자다운 체격과 점잖은 목소리까지. 외모는 합격! 분위기 또한 자연스러웠고, 편안했다. 식사 중 나눈 대화는 놀랍도록 잘 맞았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독립적인 성향, 취미 활동을 부지런히 하는 성격, 자기 계발을 위해 퇴근 후 영어학원에 다니는 태도까지. 데칼코마니처럼 나와 비슷했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았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는 말했다.
“저는 가정의 화목함이 제일 중요해요. 저희 부모님은 지금까지 제 앞에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으셨어요. 저희 부모님처럼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아뿔싸. 이렇게 모범적인 가정이 있다니. 나는 숨을 한번 깊게 쉬고, 말했다.
“실은.. 저는 이혼 가정에서 자랐어요. 사춘기 땐 조부모님과 살았고, 지금은 엄마랑 같이 지내요.”
그 말이 시작이었다. 갑자기 내 가정사를 줄줄이 이야기했다. 푼수처럼 그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쏟아냈다. 어쩌면 이 부분에 자신이 없는 나를 들켜버릴까 봐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아니, 그보다 우리가 진지한 관계가 되기 전에, 먼저 모든 것을 꺼내 놓고 싶었던 것 같다. 래퍼처럼 쉴새없이 긴 말을 마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자세가 바뀌어 있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내게 호감을 보이며 집중하던 그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아, 방어적인 자세다.’
그 순간 직감했다.
‘이 사람, 내 배경이 걸리는구나.’
나는 혼자 마음을 정리했다. 첫 만남에서 서로를 알고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메시지를 보냈다.
“ㅇㅇ씨, 열심히 사는 모습 응원할게요.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좋은 인연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싶지 않은 나는 그의 아이디를 차단했다.
그리고 몇 주 뒤, 주선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단다. 거절당해 아쉬워했다고 했다. '오잉? 뭐지?'
나는 놀랐다. 그날,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고 내가 지레짐작으로 선을 그어버린 것이었다. ‘가정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 기준에 못 미치겠지’ 나는 여전히 ‘내가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자격지심에 붙잡혀 있었다. 다시 연락해 보라는 주선자의 말에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 용기 내어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대화해 보자며 두 번째 만남을 약속했다. 그 후로 우리는 서로의 호감을 사랑으로 키워나갔다. 나는 그의 어른스러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소개팅에서 자신이 차였다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농담으로 할 만큼 자존감이 높았고, 편견 없이 나를 바라봐주었다. 그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그만큼 사랑을 주는 법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
“부모님이 미운 적은 없었어?”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어렸을 때 많이 맞았지. 근데, 지금 생각하면 이해돼. 나를 사랑하고 아끼니까, 훈육하셨던 거라고 생각해. 오히려 나를 바르게 자라게 해 주셔서 감사하지.”
그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부모를 탓하며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나는 상처가 날까 봐 늘 방어적이었고, 날이 선 채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여유롭고 단단한 그의 태도가 나조차 몰랐던 내 불안들을 녹였다.
첫 만남에서 자격지심과 두려움으로 그를 떠밀 듯 보냈던 나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다시 받아준 그 사람은 이제 나의 짝이 되었다. 내 마음만큼 무더웠던 여름, 그날의 소개팅은 스치듯 지나갈 뻔한 인연이 아닌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드디어, 내 짝을 만났다."
그 어떤 화려한 인연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그가 내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가로막는 건,
결국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