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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대중화 vs 대중의 과학화

과학은 단순한 교양으로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ㅍ

by 권석준 Seok Joon Kwon

언젠가 라디오를 듣다가, 꽤 깊은 울림을 주는 작은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이야기는 이랬다.


2016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굉장히 이례적으로 클래식 음반시장이 활성화되었던 적이 있다. 조성진 쇼팽 콩쿠르 실황 음반의 출시일에 맞춰, 음반가게 앞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너도나도 조성진 CD를 사려고 주문 클릭하기에 바빴다. 나 역시, 조성진이라는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바로 예약 주문을 했고, 지금도 차 안에서 즐겨 듣는 CD가 되었다. 이렇게 조성진이라는 스타를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클래식의 대중화가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인가 했는데, 조성진은 오히려 이에 대해 폐부를 찌르는 한 마디를 남겼다. '클래식의 대중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중의 클래식 화가 중요하다'


아마 조성진이 아닌 다른 중견급 혹은 그 이하의 연주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면, 특히 이제 약관을 갓 넘긴 젊디 젊은 연주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면, 시장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을 것이다. 건방지다는 평부터, 클래식의 대중화가 뭐가 나쁘냐는 식의 매도, 우리가 네 음반을 팔아 주는데 배은망덕한 소리 아니냐는 비아냥도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그 소신을 밝힌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고 있고, 벌써 그를 초청한 연주 일정이 전 세계를 몇 바퀴나 돌며 향후 3년 치나 잡혀 있다고 하니, 딱히 그의 소신이 피아니스트로서의 인기에는 별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한 마디 더 들어와 박힌 것은, 그의 소신이 단호했음이 아닌, 그의 소신 저 깊숙이 내재된 어떤 '철학'이었다. 클래식 애호가로서, 클래식이 어느 정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클래식의 진수, 클래식의 에지, 클래식의 참맛은 대중이라는 탈을 쓴 자본, 그리고 시장의 입맛에 맞게 둥글게 둥글게 깎인다. 자주 듣는 멜로디, 귀에 익은 교향곡, 학교에서 평가할 때 듣던 음악가 위주의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고, 그 이상을 파고드는 명연주 시리즈, 전곡 시리즈, 실황 녹음, 젊은 연주자들의 데뷔 앨범은 당연히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21세기 들어와, 음원 시장이 인터넷 위주로 재편되면서, 과거의 클래식 애호가들은 입소문을 통하거나, 공연에서 직접 접한 연주자들의 음반을 당연히 음반 가게에서 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실상 인스턴트 문화가 되어 버린 클래식의 대중화는, 결국 클래식 생태계의 왜곡을 불러일으킬 뿐이고,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거나, 새로운 악기를 선보이거나 하는 시도는 싹도 못 틔운 채, 자본의 외면을 받고 결국 사장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퓨전이라는 정체불명의 음악이 재빠르게 차지하고 있으며, 퓨전이라는 미명 하에, 일부 성악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중음악 오디션에 출전하고, 그나마 우승하지도 못한 음악가들은 '클래식도 별거 아니네' 같은 류의 놀림을 받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클래식의 대중화가 좋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마도 조성진의 소신이 내포한 진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재차 피력한 '대중의 클래식화'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자, 영원한 숙제일 것이라는 점이 또한 생각해 볼 부분이다. 어느 정도 클래식에 익숙해진 대중이라면, 스스로 공부도 하고 동호회 활동도 하면서 음악가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가 남긴 유산을 공유하며 즐기고, 거의 준-전문가 수준까지 이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럴 여유도 없는 일반 애호가들 입장에서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도 싶어도, 음악의 생태계가 제한되어 있고, 환경이 획일적이라, 딱히 동기 부여도 되지 않고, 자원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클래식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욕구는 점차 사그라들고, 일반적으로 가벼운 수준에서 가볍게 즐기는 정도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대중화된 클래식의 가벼움을 '흠미'할 수는 없기에, 그저 즐기는 정도로 귀착되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진짜 클래식의 정수는 대중화라는 미명 하에 규격화되고, 결국 규격에서 밀려난 클래식은 시장에 진입하지 못해, 대중의 클래식화는 점점 불가능의 경로로 빠져버린다는 부분은 분명히 클래식 애호가, 음반회사, 연주자들 모두가 같이 고민해 볼 부분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보자. 이제 '클래식' 대신 '과학'이라는 단어를 집어넣고 똑같은 상황을 연출해 보자. '과학의 대중화'가 중요한가? '대중의 과학화'가 중요한가? 70-9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에는, 깊은 생각이 별로 필요 없었고 (혹은 정부가 시민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적절히 산업의 발전에 도움을 줄 만한 과학을 '일부' 전문가가 기업의 입맛에 맞게 잘 활용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러한 전략은 우리나라를 단기간에 후진국에서 중진국 수준까지 올려놓았던 원동력이 되었다. 당연히, 그 시절,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거의 교양에 가까운 시험 과목 정도였으며, 따라서 실험은 차치하고서라도, 과학적 사고방식, 근거 중심주의의 철학, 회의주의가 필요한 이유, 데이터와 통계의 중요성, 수학적 사고방식과 알고리듬의 활용 등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은 불모에 가까웠다. 설사 일부 교사들이 그런 시도를 할라치면, 학부모들은 대학 진학에 도움도 안 되는 교육을 하지 말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을 거쳐 온 나를 포함하여, 그 시절 학교에서 과학과 수학을 배운 학생들 중, 문과로 진학한 학생은 물론이고, 이공계로 진학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공계와는 거리가 먼 직업을 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과학이 여전히 교양의 일부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절을 거쳐, 21세기로 들어오니, 중진국의 옷을 벗고, 이제 막 선진국으로 진입한 한국에서도 '과학의 대중화'가 일견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모양새다. 많은 전문가들이 앞다퉈 대중 과학 교양서를 내고 있고, 전국을 돌며 학교, 회사, 동호회, 지자체를 가리지 않고, 본인들의 전문성을 적절하게 사회로 환원하고 있다. 겉으로는 이러한 과학의 대중화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마음속 저편, 학창 시절 한 때 과학자가 되고 싶어 했던 일반인들의 어딘가를 긁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과학의 대중화는 계속 수요가 늘 것으로 전망된다. 당연히 늘어나는 수요에 발맞춰, 더 많은 과학 교양서가 시장에 나올 것이며, 더 많은 교양 강연회, 더 많은 전시회, 더 많은 동호회가 생겨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클래식의 대중화'가 보여 주는 맹점과 흡사하게, '과학의 대중화' 역시, 사실상 철저하게 자본과 시장의 입맛에 맞게 에디팅 되고 있으며,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우리나라 과학 교양서의 대부분은 생물, 공학, 일부 물리학에 치우쳐져 있으며, 그 외 비인기 분야의 과학은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고생물학자가 선캄브리아 시대의 종 대폭발을 다루는 고생물학 400페이지짜리 과학 교양서를 펴낸다고 가정할 때, 아마도 그 책은 전국의 도서관에 배포할 정도만 (대략 2000권 정도) 팔리고 절판될 것이다. 어떤 번역가가 수개월을 날밤 새서, 외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여성 과학자의 전기를 번역해서 출판한다고 했을 때, 그 책은 학교에서 교양서적으로 지정될 가능성은 거의 낮을 것이다. 과학의 대중화도 철저히 시장 경제의 룰을 따르기 때문에, 한 차원 더 어려운 수학이 들어가거나, 논리적으로 두세 번 더 생각해야 하는 교양서, 칼라풀한 그림이 없는 과학 서적, 혹은 준 전문서는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되고, 풀뿌리처럼 자생하려는 대중 과학 잡지들은 구독자 확보에 애를 먹으며 시장에서 밀려 날 가능성이 높다.


과학의 대중화는 일반인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매일 같이 보도되는 각종 과학 관련 뉴스를 보면, 그 성과를 제대로 해설하고 대중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문장으로 다시 써서 기사를 만드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기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거의 토씨도 안 바꾸고 ctrl+c/v 해서 사이트에 올리기 급급하다. 여전히 시중에는 게르마늄 팔찌가 수만 원대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육각수 광고도 지하철에 심심찮게 볼 수 있고, 혈액형 이야기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원적외선 치료는 아직도 많은 노인들을 낚고 있고, 각종 건강식품에는 이상한 논문으로 포장한 이상한 전문가가 이상한 신뢰감을 조성하며 환자들의 돈을 갉아먹고, 오히려 그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적당한 수준으로 과학이 소비된 후, 그것에 대한 팔로업이 없었고, 대중의 피드백을 게으르게 수용한 과학 전문가들의 무능함, 과학 담당 언론인들의 나태함, 각 대학 교수들이 연구보다 대중화에만 집중하는 현상들이 맞물려 이러한 이상한 과학의 대중화는 더욱 이상해지는 모양새다.


엄연히 말해, 각종 교양서적, 각종 강연회 등으로 과학의 대중화에 불을 지피고 나면, 장기적으로는 대중의 과학화를 향해, 현업 과학자들, 과학 커뮤니케이터들, 과학 담당 기자들, 관련 공무원들, 교사들, 교수들이 나서서 시스템을 같이 정비해 나가야 한다. 당장 초중고에서 가르치는 과학 교과서의 핵심 철학은, 1) 과학적 사고방식을 훈련하고, 2) 그것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고, 3) 데이터를 바로 읽을 수 있고, 4) 통계적 감각을 기르며, 5) 숫자 계산이 숫자에만 머물지 않도록 하고, 6) 한 번 의심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원소주기율표는 외우는데, 캔 음료에 함유된 칼로리에 대한 감이 없거나, 공룡 이름은 외우는데, 여전히 창조 과학을 외치거나, 멘델의 유전에 대해서는 배우는데, 소개팅에서 상대방의 혈액형을 듣고 성격을 함부로 재단하는 등의 사이비 과학, 유사 과학, 거짓된 과학이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또한,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근거 중심의 방법론을 교육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주어진 근거로 최대한 합리적 의견을 도출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대중이 과학화된다고 해서, 모두를 차가운 이성만 갖춘 사람으로 만들자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별을 보고 핵융합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별빛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별자리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없게 하자는 말이다. 어차피, 대중의 과학화는 대중의 삶 속에, 과학적 방법론과 사고방식이 자리 잡게 하자는 것이지, 그들을 모두 과학자로 만들자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성진이 던진 화두 속에, 시민 사회 속에서 클래식의 나갈 길이 있고, 그리고 과학이 나갈 길이 있다. 시민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누가 묻는다면, 그 시민 사회가 스스로 과학화되고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 반드시 순위에 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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