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을 이끌어가는 젊은 층, 소위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에게 가장 핫한 브랜드는 구찌가 아닐까.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Z세대는 스타일리시하다. 'It's so Gucci'는 '구찌스럽다'로 직역할 수 있는데, 젊은 층에서는 이를 '멋있다', '간지 난다', '스타일 좋다' 등의 뜻으로 사용한다.
구찌가 스타일 있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1940년대 후반부터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물자의 수입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기에 돼지가죽과 대나무 손잡이로 가방을 만들었다. 돼지가죽은 모공이 넓어 가방으로 잘 쓰이지 않지만,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 속에서 돼지가죽과 유일하게 수입이 가능했던 일본산 대나무로 만든 가방은 구찌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다. 가방의 재료로 대나무를 사용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1947년 탄생한 뱀부 백(Bamboo Bag)은 큰 사랑을 받았다.
좌: 이탈리아 여배우, 일라리아 오키니(1950년대)/ 우: 뱀부백 <출처:구찌>
구찌의 창업주, 구찌오 구찌는 1890년대 후반 런던의 사보이 호텔에서 벨보이로 일을 시작했다. 최고급 호텔에서 가방과 트렁크를 옮기는 일을 하면서 상류층의 고급스러운 안목도 배울 수 있었다. 구찌오 구찌는 가죽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고 직접 배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1900년대 다시 고향인 이태리 피렌체로 돌아와 가죽을 배우기 시작했고, 1906년에는 마구상을 열었다. 그의 초점은 여전히 상류층에 맞춰있었다. 상류층이 승마를 즐겼기에 마구상을 열었고, 말에서 자전거로 유행이 변하자 작은 가방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구찌 브랜드는 1921년 피렌체에 '구찌'라는 작은 가방가게를 오픈하면서 시작됐다.
창업주 구찌오 구찌와 그의 아들, 피렌체 매장
마구상을 운영했던 구찌는 말재갈에서 영감을 받아 홀스 빗(horse bit) 장식을 사용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지금도 구찌 하면 홀스빗이 떠오를 정도로 구찌 브랜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 중 하나다. 1950년대 가방에 처음으로 홀스빗이 사용됐고, 1953년에는 남성용 슈즈에도 홀스빗이 사용되면서 셀럽들의 사랑을 받았다. 현재까지 구찌의 클래식한 디자인에는 홀스빗이 사용된다.
홀스빗으로 장식한 구찌의 슈즈 <출처: 구찌>
구찌오 구찌는 1953년 세상을 떠났지만, 경영권은 4명의 아들 중 둘째인 알도 구찌와 막내인 로돌프 구찌가 각각 50%씩 지분을 갖고 사업을 이어갔다. 알도 구찌는 GG가 겹쳐진 로고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GG'로고는 아버지인 Guccio Gucci(구찌오 구찌)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서 GG 아이콘을 만들었다.
GG로고가 겹쳐진 프린트로 만든 가방, 지갑 <출처: 구찌>
재클린 케네디가 즐겨 들어서 유명해진 가방은 '재키 백'이라고 불리며 인기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세상에 나온 구찌의 역사적인 아이콘, 재키 백은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되어 출시하고 있고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는 가방 중 하나다. 재클린 케네디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영부인)로서 그녀의 패션은 자체가 상징성을 가졌다. 구찌 브랜드에서 재키 백은 살아있는 전설이자 유니콘(unicorn)이다.
창업주인 구찌오 구찌에 이어, 2대째로 그의 아들 중 알도 구찌와 로돌프 구찌가 대를 이었고, 3대째로 구찌오 구찌의 손주들에게까지 이어지는데 구찌가의 스토리는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구찌오 구찌의 아들, 알도와 로돌프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알도는 동생 로돌프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로베르트에게 향수 라인을 맡겨 액세서리 라인의 매출을 높였다. 하지만 알도 구찌의 아들, 로베르트와 파올로가 구찌의 이미지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버버리와 마찬가지로 라이선스(license)를 너무 남발한 것이다. 파올로는 'GUCCI PLUS'라는 짝퉁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알도의 아들, 파올로는 사업에서 배제됐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는 아버지를 탈세혐의로 신고하여 감옥에 보냈다. 실제 알도 구찌는 80세가 넘는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게 됐다. 막장드라마로 가십에 오른 구찌가의 이미지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창업주인 막내아들 로돌프는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본인의 지분 50%를 상속했지만 결국 투자회사에 본인의 지분을 넘긴다. 사치스러웠던 마우리치오의 아내는 청부업자를 고용해서 본인의 남편, 마우리치오를 죽였고 구찌가의 막장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났다.
1938년 확장 오픈했던 구찌 로마 부티크 <출처: 구찌>
런던 사보이호텔 벨보이로 시작하여 구찌 브랜드를 만든 구찌오 구찌는 상상이나 했을까. 본인의 아들과 손주에 의해 브랜드의 가치는 하락했다. 구찌의 짝퉁 브랜드를 만들어 브랜드 가치에 큰 손상을 입히고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구찌 가문 3대인 알도의 아들, 파올로. 본인의 남편을 청부 살인한 로돌프의 며느리, 파트리치아. 로돌프의 아내는 청부살인 2년 뒤에 잡혀 감옥에 갔다.
구찌는 가족경영으로 3대까지 이어오다가 1994년 이래 전문경영인의 손에 운영되고 있다. 구찌 미국 지사장을 지냈던 도메니코 드 솔레가 CEO로 임명되고, 톰 포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구찌는 살아났다. 구찌의 이미지가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브랜드로 각인된 건 톰 포드의 영향이 컸다. 섹시한 이미지를 부각하고 감각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구찌스럽다", "It's so Gucci"라고 한다면 패션에서의 극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