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없이 순수했던 그 나날들을 추억하며
https://youtu.be/P7Y50laQ7vw?si=FxA3FyW-IKxXfvN3
보통의 어느 날처럼 일찍 차로 출근을 했다. 새벽 6시 45분쯤 집을 나섰고 평소보다 더 차가 없어서 굉장히 일찍 7시 20분 안되어서 출근을 마쳤지만, 나는 내 자리에서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아노 참 감미롭게 치는 Loo piano라는 유튜버 음악가의 음악을 즐겨 듣는데, 그날도 그의 연주를 차에서 들으면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Earth wind and fire의 After the love has gone 이 나왔다. 이 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이 명곡의 대사가 내가 가던 올림픽대로 운전길을 순식간에 20여 년 전의 벚꽃 흩날리던 여의도 아파트 길로 돌려놓고 말았다.
For a while, to love is all we could do.
잠시동안, 사랑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
we were young and we knew and our eyes were alive
우리는 어렸고, 우리는 알았지. 우리들의 눈이 반짝였다는 걸
...
Oh oh oh after the love has gone
아... 사랑이 지나간 후에
what used to be right is wrong
어느 순간부터 맞던 것은 틀렸고
can love that's lost be found
잃어버린 사랑은 찾을 수 없네
윤중로의 벚꽃이 날리고, 선한 눈망울이 인상적이던 M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떠나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옇게 변하는 시야가 운전에 방해되지 않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가 점이 되어 백밀러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가장 사랑에 가까웠던, 정말 꺼내기 힘들었던 M과의 얘기를 써보려고 한다.
우리 과는 내가 입학하던 당시 정원이 90명이었다. 왜 90명이나 되었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을 예전에 인왕산 둘레길 산책 중에 기자인 선배 형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90년대 초반의 노태우 정부는 '세계화'와 '정보화'를 국정 기조로 내세우며, 기술 인력 확보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보았단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탁월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는데, 당시 대학 입학정원 조정 권한은 정부에 있었고, 특정 학문 분야 증원 정책을 통해 산업 수요에 맞춘 인력 공급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는 형의 설명이었다.
그 말이 맞는 게, 컴퓨터공학과의 정원이 50명에서 70명, 그리고 바로 90명으로 수직 상승하던 시기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과는 나처럼 초등학교 때 처음 애플Ⅱ 나 MSX 컴퓨터를 접하고, 대학 입학 때까지 과를 한 번도 안 바꾸고 입학을 한 진성 컴퓨터 덕후에서부터, 적당히 성적을 맞추어 이름이 있어 보이는 우리 과에 입학한 패션 공대생까지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다양했다. 신기하게도 그 패션 공대생들은 대부분 강남 혹은 여의도 출신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옷도 굉장히 세련되게 입고 어딘지 모르게 쉽게 다가서기 힘든 아우라 랄까 그런 게 있었다.
지금은 목동도 9 학군이라고 해서 아파트 값도 비싸고 돈 많은 집 자제들이 꽤 많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살던 당시의 목동은 단지 바로 옆에 논두렁이 펼쳐져 있는 서울의 끝자락 같은 느낌이었다. 나 역시도 가난한 공무원집 막내아들 가스라이팅을 제대로 당해서 뭔가 비싸 보이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에어 조던 농구화와 쌍벽을 이루던 에어펌프기능이 있는 샤킬 오닐의 샤크 4 농구화 딱 하나 크게 욕심을 냈었는데, 큰맘 먹고 엄마가 샤크 농구화를 사주셨던 날은 다음날 그 농구화 신고 자랑하며 농구할 생각에 설레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었다.
우리는 원래 가난하고, 농부들의 정성을 생각하며 밥알은 절대 남기면 안 되고, 사고 싶은 물건은 욕심내지 않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던 과친구들, 사탕상자 선물 공장을 같이 돌리던 녀석들 역시 강남, 여의도와는 거리가 먼 지역 친구들이었고, 나 역시 패션 공대생들이 입던 그 시절 유행하던 깃 세운 순면 셔츠와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이나 입을 거 같은 은회색 니트조끼가 랄프 로렌 브랜드의 일명 '폴로티 패션'이라는 것도 한참 나중에 알게 되었다.
M과는 소개팅으로 만났던 것 같다. 고등학교 과학반 선배형 중에 컴퓨터공학과에 한 학년 먼저 입학한 형이 있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선배 형 이자 대학교 선배 형이니 무척 각별한 인연의 형인데, 이 형에게는 여고를 다니던 여동생이 있었다. 키는 작지만 당돌한 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학 1학년 때 형네 집에 놀러 가던 날 그 여동생이 있으면 나는 괜히 얼어붙어서 눈도 못 마주치고 그랬었다. 그녀는 내가 입학한 다음 해인 97년도에 서울 소재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성격대로 바로 과대표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는 그런 내가 귀여웠던 건지 어떤 건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베프를 소개해준다고 했고, 그렇게 처음 M을 만나게 되었다. 170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굉장히 순한 인상임에도 얘기를 나누면 모든 면에서 호불호가 심하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외모에서부터 시작해서 영 나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그녀의 그런 자신 있는 모습이 왠지 싫지가 않았었다.
힘든 수험생 시절을 버티게 해 준 것 중에 Y와의 만남의 기대가 있었다고 첫 글에 쓰기는 했지만,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사실 가장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음악이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는 표현을 요즘 친구들은 이해할 수가 없을 텐데, 나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그 시절 유행하던 팝송이나 가사가 없는 이지 리스닝 계열의 재즈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그 옛날 카펜터스부터 휘트니 휴스턴이나 보이즈투맨까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의 노래가사는 지금도 거의 다 외우고 있다.
팝음악을 좋아한다 길래 나는 반가운 마음에 내가 알고, 즐겨 듣던 팝송 제목들을 꺼내 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역시나 예의 그 확신에 찬 얼굴로 나에게 훈계하듯이 그런 팝송은 진정한 팝송이 아니지라고 운을 띄웠다. 그리고 내가 들어보지 못했던 비지스와 어스윈드엔 파이어라는 생소한 밴드의 이름을 말하고는, 그들에 대한 찬양을 한 시간 정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음번 만날 약속시간을 잡자고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애프터인가 싶어서 혹시 맘 바뀔까 얼렁 그러자고 했던 순수했던 나였다.
설레던 두 번째 데이트(?) 날, M이 가지고 온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팝송 리스트 볼륨 1'이라고 적혀 있는 흰색 카세트테이프였다. 볼륨 1이라는 뜻은, 다음 카세트테이프 선물이 또 있고, 그다음 데이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나는 그녀에게 내 심장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전 세계 모두는 인정하지는 못할, 그녀만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팝송들일 텐데 그걸 나에게 강요하고 있던 그녀와 또 그게 뭐가 그리 좋다고 한수 가르침을 주어서 감사하다고 꼬리 흔드는 귀여운 강아지 마냥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너무나 웃음이 난다.
그녀와의 만남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여기 대학교 앞에서는 이 떡볶이집 외에는 모두 가짜지. 이러면 나는 별로 떡볶이 좋아하지도 않는데도 맞네. 맛의 깊이가 다르네. 이러면서 뭐에 홀린 사람처럼 떡볶이를 열심히 먹었고, 혹여 보이즈투맨 End of the road 노래는 좋지 않아?라고 감히 다른 곡 추천을 하면 이런 대중의 취향에 영합한 저질스런 멜로디를 나에게 추천해?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그 올라가지도 않는 선한 눈을 치켜뜨며 나에게 귀여운 주먹을 한방 먹였다.
그녀도 항상 바보처럼 자기 말만 듣지 않고, 가끔 반항하지만 결국 자신의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던 내가 참 맘에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처음으로 진짜 데이트 같은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건 요즘 말하는 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대학에 막 입학한 M의 입장에서는, 만나봐야 할 남자는 많았고 나는 그저 만남이 즐거운 대화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렇게 회상하는 근거에는, 내가 그런 만남에 대해 점점 지쳐갔다는 데 있다. 좋아하는 노래를 테이프에 더빙하는 방법을 그녀에게 익혀서 나도 반대로 그녀에게 내가 좋아하는 곡들의 리스트를 선물해 줬던 것 같은데, 그런 곡들에 대해서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그녀가 얘기하는 음식이나 즐겨 입는 옷의 브랜드나 그런 것들에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화가 조금씩 엇나간다고 할까. 더군다나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나는 항상 무언가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나보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핀잔을 받는 상황은 점점 내 안에 뭔가를 욱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큰 키에 어울리는 세련된 옷을 입고 나왔던 그녀였는데, 나는 그제야 그 이질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소위 우리 과의 강남, 여의도 출신의 패션 공대생들이 입고 먹고 얘기하던 그 주제의 이질감이었고, 불현듯 그녀의 집이 여의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찍이 대학 1학년때 면허를 따 놨던 나는, 아버지의 소나타 차를 빌려서 몇 번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여의도의 화려한 마천루 빌딩숲을 지나가면서 이런 별세계 같은 곳이 있구나라는 생각만 했었지, 살아온 환경 자체가 만들어 낸 다름이 이렇게 거끌 하게 나를 자극할 줄은 몰랐다.
크리스마스 즈음의 종로의 영풍문고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던 날이었나. 그날은 쌓였던 그간의 감정이 폭발하는 날이었다. 나도 과외를 하면서 나 한 달 쓸 용돈 정도는 벌고 있고, 비싼 음식 못 사 먹을 정도는 아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너는 나에게 이런 무시를 주는 것이냐. 화를 내면서 그녀 손목을 잡고 눈앞에 보이는 대로 들어간 곳이 서울 시청 옆 플라자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한 것도 처음이었고, 화를 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척 당황했을 거다. 그리고 그녀에 앞에는 처음 가본 호텔 음식점의 0이 하나씩 더 붙어있는 말도 안 되는 가격대의 메뉴판 리스트를 보고 더 당황해하고 있는 내가 앉아있었다.
2인 세트 메뉴의 가격이 내 한 달 과외비 금액보다 더 높은 가격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앞에 두고 호텔 레스토랑의 경험이 많았던 그녀는 이미 식사는 마치고 온 커플인 것 마냥 능숙하게 가장 저렴한 디저트와 그에 걸맞은 음료수를 골라 주문을 했다. 주문으로 나온 디저트는 무너진 내 마음과는 달리 황홀하게 부드러웠다. 매사에 긍정적이었던 M은 나의 이때 기억이 좌절이 되지 않게 너무 재미있는 시간이었다며, 우리 10년 뒤 이 시간에 여기 와서 다시 한번 같이 식사를 하자고 그때는 자기가 사겠다고 밝은 얼굴로 제안했다. 지금 에야 애써 남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안 주려 했던 그녀의 배려가 사무치게 고맙지만, 그때는 한 번도 호텔 같은 곳을 와보지 못했던 내 처지가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내 마음은 그녀가 좋고, 더 알고 싶고 했지만 한번 상처 입은 이성은 마음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 후의 수 없이 이성과 감성이 내 안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그 처절한 전투에서 그때의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몇 번의 서먹한 만남 끝에, 마지막 M을 집까지 데려다준 봄밤에 그녀에게 이별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처음엔 농담처럼 받아들였던 그녀는, 나의 굳은 얼굴을 보고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왜 나를 만나지 못하는데라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나의 알량한 스물몇 살의 자존심이 크게 상처 입었다는 얘기를 차마 그녀에게 하지 못했다. 나 자신이 너무 못나고 한심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울음을 꾹 참고 차로 집에 돌아오면서 그제야 차 안에서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내 입으로 이성에게 이별을 고했던, 흩날리는 벚꽃의 아름다음이 처연하기만 했던 슬픔의 봄밤이었다.
세월은 어느새 그 뒤로 10년을 지나, 그때 나는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였으며 첫째 딸마저 태어난 뒤였다. 정말이지 바쁜 가운데서도 나는 정확하게 10년 전 그날 크리스마스 즈음의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M도 이 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설레었어야 정상이었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플라자호텔의 레스토랑을 가지 않기 위한 각종 핑계를 내 맘속에서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마음의 상처는 생각보다 독한 것이어서, 10년이나 지났건만 나는 그녀에 대한 궁금함과 그리움 보다 거기서 받았던 쓰라린 마음의 상처가 그 당시에도 더 컸다. 결국, 그날 그 자리에 가지 않는 쪽을 택했고 마음 한편으로 제발 그녀가 나와주지 않기를 바랐었다. 내가 내 상처가 별거 아닌 거라고 애써 생각하듯이 그녀도 그때의 추억을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한참 나중에 대학 연합 동아리의 다른 인연으로 계속 친하게 지내던 M의 과친구들에게 지나가듯 M에 대한 안부를 물었을 때, M이 그때 그 시간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다고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고 들었다. 그때는 내 이런 심정을 설명해 줄 방도가 없었다. 또다시 10년이 넘게 지난 이제야 글의 형식을 빌어, 몇 편의 다른 그녀들에 대한 글을 쓰는 와중에, 꼭 남겨야지 했던 글을 썼다.
M아. 그때의 어렸던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지? 오랜 세월이 지나 그때를 회상해 보니, 원망도 슬픔도 모두 추억이 되네. 이제는 첫째 딸이 우리가 만났던 그 나이가 되었다. 때론 힘들었고, 때론 행복했던 그 시절은 이제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내 딸도 혹시 너에게 있을 아이도 세상에 사랑이 전부였던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우리는 조용히 그들을 축복해 주면 되는 거겠지. 네가 좋아했던 비지스의 가사처럼 말이야. 이제는 즐겁게 너에게도 추억에게도 담담하게 안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덕분에 그때 행복했어. 고마웠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