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정 강사 작가 May 01. 2020

근현대사 인문학 강의 - 우금치전투

오늘은 조선말 1880년대의 주요 사건인 임오군란, 갑신정변, 우금치 전투에 대해 알아봅니다.



1.임오군란(1882년)

임오년에 일어난 군인의 난입니다.  1876년 일본에게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강제 개항당한 조선은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사람을 파견합니다. 일본에는 수신사,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보냅니다. 배우고 돌아온 결과로 무기공장인 기기창을 세우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편성합니다. 별기군에게는 구식군인들보다 많은 급료, 좋은 옷, 무기가 지급됩니다. 여기에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비 민씨 친척들의 부정부패로 구식군인들은 여러 달 동안이나 급료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다 13개월만에 나온 곡식에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구식군인들이 폭발하여 신식군, 별기군의 일본대장을 죽이고 민씨 친척들도 죽입니다. 왕비 민씨는 궁녀복 차림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무능했던 고종은 이 사태 해결을 9년전 권력에서 물러났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영선사로 청나라에 갔던 김윤식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바람에, 조선으로 들어온 청군에 의해 흥선대원군은 텐진으로 납치되고 맙니다. 또한 청군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이라는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문화합니다. 여기에다 일본은 임오군란때 일본군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서울에 군사를 주둔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청과 일본의 조선 침략 대결이 본격화 됩니다.


2.갑신정변(1884년)

갑신년에 급진개화파가 시도한 정치 혁명을 뜻합니다. 당시 조선에는 개화를 두고 네 가지 정치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급진개화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온건개화파(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수구파(민태호, 민영식 등 청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고자한 사람), 위정척사파 (최익현,이항로 등 외세를 배척한 사람들)가 그것입니다. 급진개화파는  청과 손잡은 수구파에 불만을 품고 일본의 메이지유신 모델을 본받아 문화와 기술 모두를 바꿀 것을 주장합니다. 반면 온건개화파는 동도서기 즉, 정신은 동양, 기술은 서양을 주장합니다. 1884년 청나라가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전쟁이 발생하자 임오군란때 조선에 파병했던 군사 일부를 그쪽으로 빼갑니다. 그러자 급진개화파는 일본군의 지원을 약속 받아 정변을 시도합니다. 이때 왕비 민씨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당시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가 청군 1500명을 이끌고와 정변 세력들을 공격합니다. 지원하기로 했던 일본은 배신하고 3일만에 정변을 막을 내립니다. 홍영식은 죽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으로 서광범과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갑니다. 김옥균은 일본에 가서 일본군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1890년에 풀려난뒤 1894년 상하이에서 조선정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된 후 한강변에 목이 걸리게 됩니다.


3.거문도 사건(1885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 조선에 도움을 준 청은 노골적으로 조선을 속국 취급합니다. 자립할 힘이 없어 청나라에 의존했던 조선 집권 세력은 또 다른 외세를 찾게 됩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에 붙기로 합니다. 그러자 청의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하겠다고 위협하고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세력확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영국은 여수 앞바다의 거문도을 불법 점령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합니다.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있으며 대마도와도 멀지않아 군사적으로 요충지에 해당합니다. 영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문도에 관심이 많아 조선에 조차를 요구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불법점령에 성공한 후 거문도를 해밀턴항이라고 부릅니다. 포대와 병영을 만들고 연료 저장소도 만듭니다. 거문도 주민과의 관계는 원만했고 주민들은 가끔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수와 의료 서비스도 받았다고 합니다. 불법점령 2년뒤 러시아가 조선 침략 의사가 없음을 확약받고 철수하게 됩니다.


4.우금치전투(1894년)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당하고 청나라, 러시아, 영국에 의해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민씨 집권세력은 변함없이 무능하고 부패했습니다. 이때 농민들 사이에는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80년대 중반이후에는 그동안 탄압 받던 천주교도는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는데, 유독 동학에 대해서만 정부에서 탄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1892년, 1893년 삼례와 보은에서 집회를 갖고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죄를 풀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과 함께 외세배척, 탐관오리숙청의 구호를 외칩니다. 그러나 보은집회 후 정부는 동학 금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러다 1894년 전북 정읍에 해당하는 고부의 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맞서, 당시 동학의 고부 접주였던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고부관청을 점령합니다. 조선 정부는 조병갑을 잡아 들이기는 했지만 동학교도도 체포합니다. 전봉군과 동학농민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전주성까지 함락합니다. 이때 무능한 조선 집권세력의 전매특허가 나옵니다. 다시 외세인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곧 조선땅에서 청일전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지난 갑신정변때 청나라와 일본은 텐진조약을 맺어 양국중에 누구라도 먼저 조선에 파병을 하면 나머지 한 나라는 자동 파병한다고 명문화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병합니다. 이때 일본은 동학군에는 관심이 없고 조선 정복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청나라는 아산만으로 파병하지만 일본은 바로 인천으로 들어가 서울로 향합니다. 그리고 궁을 점령하여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 정권을 수립합니다. 이때 조선은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민씨 세력도 축출됩니다. 전봉군과 동학농민군은 뜻하지 않게 외세가 개입되자 청일 양군에 대해 철군을 요구함과 동시에 자신들도 해산합니다. 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철군에 동의했지만 원래 조선을 정복하러 온 일본은 철군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아산만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청군을 조선에 몰아냅니다. 이때 흩어졌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2차 봉기합니다. 그러나 게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조선관군에게 공주 우금치에서 무참히 학살당합니다. 이것을 우금치 전투라고 합니다. 피해인원수에는 여러 말들이 있지만 동학군 3만명 또는 10만명 중에 500명만 살아 남고 일본군은 1명만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기의 차이와 함께 기관총의 위력을 모르고 밀집대형의 전술을 구사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금치 전투로 막을 내린 동학 농민 운동은 개인의 정권욕이 아닌 나라를 개혁하고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자하는 선한 의도가 있는 민중 주도의 민주화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순창에서 재기를 꾀하다 부하의 밀고로 잡혀 처형당한 전봉준의 유시입니다.


때가 이르러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썼으나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꾀할 바가 없구나

백성 사랑에 온몸을 바쳤으니 내 잘못은 없노라.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겠나.

(인문학 강사 - 손정,  근현대사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OKR을 이용한 성과관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