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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 강사 작가 Mar 12. 2020

밥에도 도가 있어야 한다

밥에 무신경한 편이다. 밥이 갖는 두 가지 의미에 대해 모두 그렇다. 하나는 식사를 뜻하는 밥이고 또 하나는 반찬에 대비되는 의미인 쌀밥, 보리밥 할 때 그 밥이다.    


먼저, 식사를 뜻하는 밥 먹기는 나에게 한 끼 때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다. 가족이 다 같이 먹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릇 하나에 밥 넣고 반찬 몇 젓가락 넣어 비벼 먹고 치운다.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다. 그릇 씻는 시간 역시 아까워서 사용하는 그릇이 최대 두 개를 넘지 않는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먹을 사람이 있으면 식당에서 먹지만 혼자라면 편의점 1,300원 짜리 빵이면 족하다. 그마저도 먹는데만 온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걸어 가면서 먹거나 책이라도 본다. 그렇게 먹고 되겠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 세상에 몸에 탈나는 게 너무 잘 먹어서 그렇지, 아무리 못 먹어도 옛날보다는 잘 먹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반찬의 짝인 밥 자체도 그렇다. 어떤 이는 방금 한 밥이 아니면 안 먹는다든지 찬밥, 질거나 된밥, 때로 특정 지역의 쌀을 따지는 경우도 있다는데 나는 그런 거 없다. 찬밥이든 어제한 밥이든 작년에 찧은 쌀이든 그저 반찬의 짠 기운만 없애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며칠 전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먹은 큰 딸이 대뜸    

 

“엄마, 밥이 먹고 싶어, 식사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쌀밥만”    

“그래? 그럼 전기밥솥에 하지 말고 뚝배기에다 조금만 해주까?”  

  

하더니 밥을 한다. 계란찜 할 때 쓰는 작은 뚝배기에다 전기밥솥 사면 들어 있는 1인분용 계량컵으로 쌀을 한 컵 넣고 가스렌지에 불을 켠다. 전기밥솥이야 지가 알아서 끓이고 김 빼고 뜸들이고 하지만 냄비밥은 사람이 일일이 해줘야 한다. 뚝배기 특성상 한번 끓기 시작하면 밥물은 자연스레 넘칠 수 밖에 없다. 넘치는 걸 막겠다고 뚜껑을 열고 불을 줄여 버리면 수분만 날아가고 밥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불조절은 하되 뚜껑은 닫아 두고 적당히 넘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삼층밥이 되지 않으려면 불을 줄이는 시점과 완전히 끄고 뜸 들이는 타이밍도 잘 잡아야 한다. 고수가 아니고서는 냄비 옆에 붙어 서 있어야 한다. ‘밥을 한다’가 아니라 ‘밥을 짓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밥은 잘 되었다. 큰 딸은 반찬도 없이 흰 쌀밥만도 고소하다며 먹는다. 거실에 있던 작은 딸도 식탁 앞에 어느새 앉아 있다.     

이 광경을 보고 문득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쌀밥의 맛’ ‘냄비 밥하기’ ‘엄마의 정성’ ‘역시 한국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해’ 같은 주제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뜬금없이 금강경 1장이 떠오르면서 삶의 자세와 연결하고 싶어졌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지혜를 담고 있다하여 금강경인데 1장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글이 고작 석가모니께서 손수 걸식해온 음식으로 공양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정리하고 바르게 앉으셨다는 게 전부다. 대개 경전의 주제는 첫 장에 있기 마련이다. 배우고 갈고 닦아 예를 이루라는 논어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배우라는 말이다. 세상을 고정된 기준으로 보지 마라는 주제를 전하는 노자의 도덕경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로 시작한다. 이것이 기준이다, 가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의 의미다. 그리고 나머지 80장도 이 범주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께서 밥을 드시고 옷을 정리하고 자리에 바르게 앉으셨다는 말은 왜 금강경의 빛나는 지혜 가운데서도 제일 처음에 나와 있는 걸까?     

도(道)가 멀리 있지 않다는 뜻이다. 평범한 일상과 내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의미다. 확장하면, 회사 가서 일 잘 해야지 하기 전에 일어나면 이부자리 먼저 개는 게 하루의 시작이며 남들과 소통 잘 해야지 하기 전에 가족한테 ‘잘 잤어?’ 하고 물어 보는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내가 길에서 1,300원짜리 편의점 빵을 먹는 것하고 집에서 5분 만에 밥을 대충 비벼 먹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상관이 있다. 내가 밥 먹는 시간 아껴서 읽는 책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읽고 있는 걸까? 지금 책상 위에 펼쳐진 책만 세 권이고 쓰기 위한 연습장과 노트도 두 권이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를 포스트잇에 적어 두고 컴퓨터에 옮겨 적인 못 한 것만 수십 장이다. 무언가를 쉬지 않고 하고 있지만 방향성과 매듭이 부족하다. 이러다가 다른 주제로 강의하거나 글 쓸 일이 생기면 그쪽으로 쓸려간다. 읽다가 만 책은 그렇게 덮혀 꽂히기도 한다. 석가모니께서는 손수 밥을 빌어 오시고 그릇을 씻으시고 옷을 개놓고 설법을 시작하신다. 설법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밥을 빌러 가는 일을 하지 않겠다, 내 그릇은 누가 대신 씻어 달라’가 아니다. 밥을 비는 것 자체가 이미 삶이고 도다. 그릇을 씻는 일이 곧 수행인데 그것이 행해지지 않은 설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내가 오늘부터 혼자 있을 때 밥솥에 뜨거운 밥을 하고 찌개를 데워 내고 식탁에 바르게 앉아 밥을 먹겠다는 것은 아니다. 5분 만에 밥을 먹어 치우더라도 길에서 1,300원짜리 빵을 먹더라도 방향과 매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다. 삶을 진정으로 살아 내고 있는 것인지 삶조차도 해치우고 있는 것인지의 문제다. 설거지 하지 않은 발우를 두고 하는 설법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개운치 못하다. 매 순간 내 행위의 의미를 생각한다. 흘러넘치는 밥물에 가스렌지가 더러워짐을 감당하는 이유는 밥을 먹고 싶다는 딸의 혀끝에 구수한 쌀밥의 맛을 주기 위해서다. 그릇하나에 이것 저것 넣고 5분만에 먹는 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5분이 아니라 1분이어도 상관없다. 그 순간이 의미를 갖는다면. 나의 루틴을 생각한다. 1,300원짜리 식사에도 도(道)가 있어야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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