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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ignBackstage Aug 07. 2024

둔감해지는 법

<성공, 처세> 둔감력 수업


학창 시절 1번의 글쓰기상과
12번의 그림 그리기상을 받았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초등학생시절의 어린이날은 언제나 즐거웠고 설레며 기다렸었다. 선물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관대해지는 엄마 아빠의 너그러운 미소가 좋았고 매년 어린이날 우리 가족이 가는 행사가 좋았다. 집 근처에 있는 두산연수원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매년 열렸었는데, 친척이 두산그룹에 다니고 있어 가족찬스로 매년 참석했었다. 연수원은 집 근처에 있는 유일한 오피스 건물이었지만 평소에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고 주변에 높은 팬스가 쳐져 있어 비밀의 성 같은 느낌이었다. 그 비밀스러운 곳이 어린이날에만 열린다 하니 설레며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다. 그 높고 큰 문이 열리면 신나는 노랫소리와 함께  정갈하게 깔린 잔디 카펫 위로 힘차게 뛰어 들어갔다. 행사 중에는 사진기자분들이 찍어주는 사진들도 수준급이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항상 가장 화려한 원피스를 입혀 나를 데려가셨고, 나 또한 불편한 옷에 투정 부리지 않고 빳빳하게 풀 먹인 레이스를 펄럭이며 따라나섰다. 비눗방울을 터트리고 알록달록 색상의 풍선을 가득 손에 쥐고 뛰어다녔다. 엄마가 준비한 과일 간식을 먹고 돗자리에 누우면 마치 한 왕국의 공주가 된 느낌이었다. 이 날 행사에서는 사전에 어린이날을 주제로 한 백일장이 열렸는데  어린이날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을 '비밀의 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며칠 뒤 백일장에서 3등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기업사보지에 내 사진과 글이 실렸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돋보이는 증명사진이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내 생애 첫 글쓰기상이었다.


그 뒤로 많은 그림 그리기 상을 받았다. 불조심포스터, 과학 상상화 대회, 학교사랑 그림 그리기 대회 등 여러 번의 상을 받고 내 그림이 전시가 되었다. 여러 번의 그림 전시 옆에 학교명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단 한 번의 내 수상글 옆에는 학교명과 이름 그리고 증명사진이 같이 실려 있었다. 마치 이 글이 나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예술작품 옆 작가의 도장이 찍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시간이 흘러 글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가끔씩 일기를 쓰곤 했는데 간단한 이슈나 이벤트를 키워드로 적어 정리했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크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때에는 여러 장을 넘겨가며 긴 글을 썼고 힘주어 쓴 펜자국에 눌려 다이어리가 뚱뚱해 지곤 했다.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하루 동안 스트레스와 공해들로 쌓여 있던 내 몸의 독소가 다 빠져나가고 순수한 나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꾸준히 쓰지 못하는 걸까? 여러 해 진지하게 고민해 봤지만 답은 생각보다 쉽게 서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 도서들을 보며 저렇게 많은 쟁쟁한 작가분들 사이에서 과연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덜컥 들면서부터였다.  글 쓸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운근둔’이라는 말이 있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비결이하고 하는데 말 그대로 행운(運)과 근(根) 끈기 있는 성실함과 둔(鈍) 둔감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심리 카운슬러인 우에니시 아키라는 <둔감력 수업>에서 민감한 사람들은 경쟁사회에서 심리적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에 둔감해지는 능력, 둔감하게 살아가는 능력이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표지가 좀 독특하다. 세밀화로 그려진 듯한 꽃이 보인다. 국화인 건가 한참을 들여다보았는데 솔방울이었다. 장식품으로만 여겨지던 솔방울이 왜 둔감력과 관련된 이미지로 등장하게 된 걸까? 솔방울은 소나무열매의 송이로 씨앗이 들어있는 자그마한 비늘들이 둥글게 모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작은 비늘들이 재미있는 역할을 한다. 솔방울은 습도에 따라 비늘이 펼쳐지거나 접히는데 습도가 낮을수록 비늘이 펼쳐져 우리가 자주 보는 익숙한 솔방울의 모습을 띤다, 반대로 습도가 높을수록  콘처럼 오므려든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때론 건조하게 바라보고 좋은 의미의 둔감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마치 활짝 펼쳐진 솔방울처럼 말이다. 주변의 말과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축축하게 젖어 있는 상태에선 높은 습도에서의 솔방울처럼 몸을 한껏 웅크리게 된다. 솔방울이 윗부분은 닫혀 있지만 하단에서부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마치 이 책을 읽고 다 같이 둔감력을 키워 서서히 변화해 나가길 바라는 모습을 표현한 건 아닐까? 솔방울의 이미지 또한 연필로 드로잉 하여 나타낸 것이 인상 깊다. 연필은 드로잉에서 기초가 되는 작업으로 많이 쓰이며 수정하기도, 구하기도 쉬운 도구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기초가 되는 성공의 도구로 둔감력을 쓰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서점에서 신간 코너가 아닌 고전코너로 발길을 옮겼다. 새롭고 다양한 카테고리의 작가분들의 책을 잠시 뒤로하고 옛 현인들을 만났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사이에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들 것 있음에 경의 로움을 느꼈다. 사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많다. 하지만 오래도록 살아남은 대가들의 글을 읽으며 오히려 더 큰 용기가 나는 아이러니 함은 무엇일까 그들은 그들 만의 세계가 있고 나는 나만의 생각의 길이 있다는 본질을 마음에 새기며 쏟아지는 새로움에 무뎌 지기로 했다. 나만의 둔감해지는 방법은 비슷한 고민을 했을 대문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답을 찾는 것이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글쓰기를 방해받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난 행운이 있으니 이제 둔감함을 등에 업고 성실하게 글쓰기에 몰두하면 된다.
'운근둔'을 마음에 새긴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과 디자인을 좋아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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