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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ignBackstage Sep 19. 2024

상상으로 먼저 읽기

'이 책은 어떤 책일까?'

책 한 권 추천해 줄 수 있어요?

친한 후배가 여름휴가 동안 오랜만에 책을 읽고 싶다며 책 추천을 부탁했다. 지난번 휴가 기간 내내 재미 읽게 읽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망설임 없이 추천했다. 전쟁에게 남겨진 이들의 외롭고 처참한 심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인물들의 거짓말을 추리하며 전쟁의 처참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깊어지며 여운도 길었던 터였다. 후배는 그동안 바빴던 업무를 뒤로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혼자 발리로 떠났다고 했다. 해변가를 걸으며 노을 뷰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말랑말랑한 글을 읽으며 밝은 에너지에 취해 여행을 시작하려 했던 그는 글을 읽으며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쌍둥이 주인공의 할머니가 그들에게 개자식들이라 부르는 세 번째 장에서 책을 덮었어야 했어요”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가 넘어가는 노을 앞바다에서 책을 펼칠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나처럼 기역자로 꺾인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버터구이 오징어를 질겅이며 책을 볼 거라 생각했었다. 독서를 대하는 너의 로맨틱한 태도를 예상치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이 흥미로웠다. 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호기심도 짙어졌다. 소설 외에도 인문학 도서도 자주 읽는데 심리학 도서는 인간의 다양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관계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고, 역사서는 다른 나라의 문화적 배경을 알 수 있어 흥미롭게 느껴졌다. 내게 책은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에너지원이었다. 책에서 밝은 에너지를 찾으려 했다는 그의 말에 나 또한 많이 놀랐다. ‘난 아주 편협한 독서를 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서로에게 놀랐던 여름이 지나갔다. 


저녁약속이 있어 옷장 문을 열었다. 위쪽에는 소재와 두께의 차이만 있을 뿐 군더더기 없는 장식의 상의들이 얇은 순으로 걸려있었고, 아래쪽은 하의는 짙은 블루진이 서랍장 위에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미세하게 변화를 추구하는 나를 발견했다. 서재와 옷장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다양한 책을 읽으며 안목을 넓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어떻게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할지 막연하게 느껴졌다. 옷과 책은 매일 만나는 일상에 녹아 있으니 일상의 루틴을 조금씩 바꿔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오늘은 좀 새로운 경험을 해보자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말쑥한 외모의 소믈리에가 와인리스트와 메뉴판을 탁자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고, 오늘의 시그니처 요리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나는 요리에 맞는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고  소믈리에는 안경알과 다리사이를 가볍게 추켜세우고는 선호하는 나라 혹은 품종을 물었다.

특별히 선호하는 나라와 품종은 없고,
새로운 와인을 경험하고 싶어요!

소믈리에는 칠레산 까베르네 쇼비뇽, 호주산 쉬라즈, 프랑스산 쇼비뇽 블랑도 아닌 남아프리카 공화국 슈냉블랑을 추천해 주었다. 잠시 뒤 테이블 위에 차갑게 칠링 된 '데이비드 핀레이슨 카미노 아프리카나 슈냉 블랑, David Finlayson Camino Africana Chenin Blanc' 와인을 올려놓고 어떤 느낌의 와인일 것 같냐고 물었다.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로는 남아공에서 재배된 슈냉 블랑 품종의 화이트 와인이라는 것과 아이보리 바탕에 세 개의 산맥이 그려져 있는 와인 라벨뿐이었다. 마치 셜록홈스가 된 것처럼 라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라벨에는 거친 암벽 앞에 수많은 가시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다. '아프리카니까 선인장인가?'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와인라벨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포도나무라고 생각을 했다. 나무 없는 산, 바짝 마른 듯한 가시나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이 부족한 땅에도 강한 포도품종일까요?
그렇다면 뭔가 수분이 빠진 진한 느낌! 바디감이 무거울 것 같아요!
'데이비드 핀레이슨 카미노 아프리카나 슈냉 블랑' 라벨

그는 약간 몸을 뒤로 젖히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듯 놀란 모습에 나는 내심기분이 좋았다.


이 와인은 1947년, 1961년에 심어진 올드바인(Old Vine)으로  깊이 자란 뿌리 덕에 땅속 깊이 있는 물길을 잘 찾아내 가뭄에도 강하다고 한다. 대서양의 해풍을 오래 맞은 이 품종은 오랜 세월 동안 미네랄과 소금기가 토양에 그대로 전달되어 맛의 풍미가 깊다고 했다.


RIEDEL  Wine Glass

와인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은 여러 번 해봤었지만 "어떤 맛일 것 같나요?"라는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 와인을 마시기 전에 어떤 와인일까 상상해 볼 수 있었고, 소믈리에가 설명해 준 내용을 듣고 맛이 구체화 됐다. 온도가 달라짐에 따라 맛과 향이 피어오른다는 설명과 함께 눈사람처럼 생긴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두껍게 부드러운 맛 뒤에 쌉쌀한 맛이 났다. 약간 비릿한 맛에서 미네랄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목 넘김의 끝에 짭짤한 염분기가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오크향이 점점 강하게 올라왔는데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고군분투했던 강인함이 피어오른다고 생각하니 맛에서 생명력이 느껴졌다.


와인의 매력은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맛과 향이다.  페어링 되는 음식과 잔의 형태, 적절한 온도와 산화된 시간등 다양하고 섬세한 조건에 따라 같은 와인도 새로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맛일까 상상하며 와인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소믈리에의 설명을 통해 와인의 스토리를 듣는 단계가 추가되었다. 머리와 가슴과 혀를 통해 온몸에 느껴지는 감각은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한다. 이 강렬했던 경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소믈리에에게 스토리를 듣고 경험하면 확실히 맛의 레이어가 하나씩 느껴진다. 하지만 설명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맛을 찾게 된다. 들은 대로만 느끼고 오는 것이다. 소믈리에의 전문적인 설명을 듣기 전 어떤 맛일까 상상을 하고 경험한다면 새로운 것을 맛볼 수 있게 된다. 능동적으로 맛을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맛보지 않고 맛을 느껴보는 새로움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맛보지 않고 맛을 느끼는 방식이라니. 그렇다면 읽어보지 않고 책을 상상해 보는 경험은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책을 읽기 전 표지를 보며 탐정이 되어 질문해 보는 거다.

이 책은 어떤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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