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밤이 영원할 것처럼
메로나 두 입 베어 물고 단맛이 강하게 느껴져 내려놓았다. 맵기로 유명한 엽기떡볶이도 몇 개 못 먹었다. 학창 시절 아이스크림 하나로는 부족해 엄마를 졸랐었고 매운 떡볶이를 먹다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면 쿨피스 한잔으로 화기를 끄기를 반복하며 두 접시는 거뜬히 해치웠다.
어릴 때는 자극적인 맛과 멋에 끌렸다.
대학시절 나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거리를 누볐다. 남들과 다른 패션이 마치 가장 큰 경쟁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려하게 나를 꾸미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은 각종SNS뿐 아니라 기사 제목들 마저 자극적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밋밋한 끌림이 있었다. 나 좀 봐달라는 호소 따위는 없었다. 가독성 낮은 제목과 크기, 물 빠진듯한 컬러, 뭐 하나 뚜렷하지 않은 색의 경계, 옴니고딕체의 세로 쓰기가 자신만만해 보였다. 간판 없이 아는 사람들만 찾아가는 을지로의 숨은 식당처럼 덤덤하고 꼿꼿한 태도가 나를 건드렸다. 주조색으로 쓰인 빛바랜 코럴 핑크 밑으로 아치형태의 가벽이 세워져 있고, 그위로 하얀 원이 올라가져 있다. 원이 굴러 떨어져 바닥에 비슷한 크기의 구멍에 끼워지는 상상을 했다. 아치 형태 문 안쪽과 바닥에 구멍 만이 짙게 표현되어 있었다. 어두운 블루그레이 컬러 외에 나머지 컬러들은 각자 다른 색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명도가 비슷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하나의 색으로 보였다.
단편소설 <밤이 영원할 것처럼> 중 '토요일 아침의 로건'의 주인공 로건은 외국계 의료기기 회사를 다니며 그토록 원했던 미국지사 발령을 받는다. 하지만 주인공은 출국을 앞두고 뇌종양 선고를 받고 크게 당황한다. 발령을 희망하며 받아온 4년간의 영어수업을 끝내야 하는 상황인 그는 영어 선생님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 깨달았다.
영어교사와 마지막 수업을 하고 카페를 나오자 그는 그 재서야 본인의 선택을 깨닫게 된다. 토요일 아침의 로건으로 지내지 않기로 한 결정은 영어 과외를 그만두었다는 것만이 아닌 그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달려왔던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이별이기도 했다.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 주인공이 또 있었다. '밤이 영원할 것처럼'에서 주인공 동희는 갑작스레 발목을 다치게 된다. 마치 불행이 시작이 되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던 직장에서 느닷없이 자리이동 지시를 받는다. 좌천이 아니냐는 소문들이 무성했지만 그녀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는다. 다만 발목 통증을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 줄 뿐이었다. 치료를 위해 그녀의 치열함의 상징이었던 하이힐에서 내려오고, 자신의 자리에서도 하나씩 내려오게 된다. 바쁜 업무로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자신을 돌보는 모습을 덤덤하게 그리며 발목 치료뿐 아니라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사생활을 해본 이들이라면 같은 팀이나 부서에서 한 번쯤은 만나 봤을 상사 혹은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든 다양한 이유들로 앞만 보며 달리던 이들이었다. 능력 있고 성실했던 그들은 바쁜 일상 속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건강과 회사생활은 영원하지 않고 모든 것은 유한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유난히 마지막 모습을 보류하며 외면한다. 끝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생각만으로도 불편하다. 하지만 그 두려운 단어를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끝이 있기 때문에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퇴사를 인지하는 순간 제2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고, 노화를 인정하면 식단과 운동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이 불편한 단어들을 인정하며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꾸준히 나의 다음 스테이지를 위해 자신이 무엇에 몰두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절약하며 가진 것들을 관리한다. 입맛도 그렇다. 건강을 위해 간이 거의 되지 않은 자연식의 식단을 찾게 된다. 양념이 잔뜩 올라간 함흥냉면보다는 덜 자극적인 평양냉면을 찾고, 떡볶이보다는 최소한의 양념으로 조물거린 나물에 쓱쓱 비벼 먹는 밥을 좋아한다. 자극적인 즐거움은 꾸준히 즐길 수 없는 것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식탁 위 녹아 버린 메로나를 보며 '내가 어른이 되고 있는 건가?' 라며 이죽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한 가지 색처럼 보였던 조각들은 이야기 주인공들의 다양한 삶을 표현한 것 같았다. 가까이 보면 각자의 삶은 다 다르지만 지긋이 눈을 뜨고 바라보면 하나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바로 큰 결정을 앞두고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과의 깊은 대화에 집중하느라 밖으로 표현하는 에너지를 쓸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유난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침잠하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것이다. 슴슴한 맛과 멋이 늘어갈수록 그들의 속 마음은 치열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주인공들의 다음 챕터는 어떻게 헤쳐나갈지 자꾸 그려보게 된다. 마치 잊힐만하면 생각나는 슴슴한 평양냉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