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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ignBackstage Sep 05. 2024

권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

<에세이> 불안의 책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더위를 쫓으려 추위를 피하려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는 가을이다. 살랑대는 바람과 적절한 온도가 유지되는 쾌적한 날씨는 풍경을 담는 시간과 비례한다. 하지만 점점 불어오는 바람에 차가움이 실린다면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서서히 물드는 단풍잎,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두꺼워지는 옷차림, 뒤뚱거리며 타던 두 발 자전거를 한 손으로만 잡고 타는 아이처럼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가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의 책> 앞표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뭐 하나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일러스트가 표지를 꽉 채우고 있다. 점묘화 기법으로 형태를 표현한 모자 윗부분과 존재감 있는 모자챙이 위아래 영역을 나누듯이 가로지르고 있다.  안경알은 한쪽만 보이고 반대쪽 안경알은  물방울이 흩뿌려져 있다. 시선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름을 이야기하는듯하다.  얼굴 양쪽에 위치하고 있는 물결과 격자무늬가 보인다. 콧수염과 나비넥타이 모든 모티브에 각기 다른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표지에 일러스트의 조각들이 파편화된 모습은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불완전한 모습들이다.

도통 이유를 모를 것 같은 이 조각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저자의 문학적 삶을 들여다보며 조각 모음을 해보기로 했다.


마치 조각난 그림처럼 실제로 페소아는 수십 개의 문학적 자아가 있었다. <불안의 책>을 처음에 쓰기 시작할 때에는 '비센트 게드스'라는 이명으로 시작했지만 추후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 이름으로 대체됐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사후 저자의 메모를 엮어 이 책으로 만들었는데 무려 481개의 메모 글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쓰인 글들은 조각난 그림처럼 읽는 내내 맥락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하나로 모아지는 게 있다면 그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저자의 생각은 불안했고 여러 번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내 문해력에 나 또한 불안했다.


더 권태로워지리라는 예감을 동반한 권태,
내일이 되면 오늘 후회했다는 사실을 후회할 것이 분명한 후회,
쓸모도 없고 진실성도 없이 혼란스럽기만 한 혼란


이 글을 읽고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꽉 막히는 이 감정은 뭐지? 불안한 마음을 좀 잠재워주는 책이지 않을까 하고 책을 펼쳤는데, 권태, 후회, 혼란이라는 단어의 나열을 어쩜 이렇게 숨 막히게 쓸 수 있을까 감탄했다. 내 불안함은 이루지 못한 것 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책을 펼쳤는데 이런 감정의 광속횡보라니! 그 거리를 맞추기 위해 눈과 마음이 바빠졌다. 저자의 메모에는 자신의 글에 대한 의심과 불안함이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그러하듯.


마치 수많은 메모들에서 읽히는 그 불안함이 차곡차곡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듯 나의 불안한 이 감정을 모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결핍이 있어 불안한 것이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면 과연 그 결핍은 내게 더 이상 부족함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글에 대한 의구심은 언제나 있지만 이 글을 누군가가 읽지 않더라도 글쓰기는 내게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로움 속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말하는 나만의 생존신고 같은 역할을 하는 행위이다. 저자는 집에 다른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권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두껍고 푹신한 팔걸이의자와 커튼 그리고 양탄자는 신중하게 고른다고 한다. 나는 권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멍하니 한 해를 보내면 어떡하나 라는 불안함 뒤에 매주 하나씩 올리는 나만의 글들이 남겨있었고 매주 2번씩 하는 요가로 내 안의 속근육들의 쓰임이 달라지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서서히 경지에 오를 것을 확신한다. 다만 그 길에 불안해하지 말고 즐기라고  페르난도 페소아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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