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 나무의 노래
책표지를 꽉 채운 나무사진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백 없이 채워진 이미지 때문일까 빼곡한 책 빌딩 가운데 피톤치드가 쏟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희망과 순수함을 나타내는 핑크 컬러의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가 보였다. 상대적으로 가는 나무 기둥 위로 풍성한 나뭇잎이 뺴곡하게 채워져 둥근 형태로 우뚝 서있다.
빈틈없는 나무들 사이 치열하게 우뚝 솟아아 오른 이 나무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줄 것 같았다.
<나무의 노래>는 미국의 생물학과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쓴 생태학적 나무 연구 기록서이다. 아마존 열대우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지역, 스코틀랜드, 동아시아 일본 등 전 세계 12종의 나무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숲 지붕을 타고 올라가 살펴보거나, 죽은 나무에 돋보기를 갖다 대기도 하고, 콩배나무에는 전자 장비를 부착해 소리를 들으며 나무와 소통하고 생명과 교감하고자 애썼다. 숲 한가운데 핑크빛 꽃이 만개한 나무는 책에 소개한 12 나무 중 하나인 붉은 물푸레나무로 추측된다. 저자가 관찰한 물푸레나무는 강풍으로 인해 쓰러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나무였다. 죽어가는 나무 밑동에서 다른 나무가 자라고, 쓰러져 엉킨 잔가지는 캘리포니아 굴뚝새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통나무 사이에 몇몇 균류가 뿌리내리며 다양한 버섯이 자라고 이는 다양한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죽은 나무를 통해 이어지는 자연의 다양한 연결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장 초라하고 볼품없이 죽어가는 나무를 통해 가장 빛나는 핑크빛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생명은 끝났지만 그 끝에 새로운 시작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무를 통해 보여주었다.
손가락 만한 소시지를 꼬치에 꽃아 밀가루 반죽을 여러 번 입혀 큰 어른 주먹 만한 핫도그를 좋아했다. 고등학생시절 하굣길 커다란 핫도그를 설탕에 듬뿍 빠트린 뒤 한입 크게 물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회전을 하려는 마을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정차를 했고 버스 안 남고생들과 입, 코에 설탕을 잔뜩 묻힌 채로 눈 맞춤을 당했다. 버스가 떠나자 친구와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허기를 채우고 나면 바짝 오그라든 플라타너스 낙엽을 퐁당퐁당 밟으며 집에 갔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낙엽을 보면 바스락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던 까르르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기분 좋은 추억으로 순간이동 시켜주던 플라타너스 낙엽을 요즘 보기가 어려워졌다. 서울에서 자주 보이던 플라타너스는 봄 철 날리는 꽃가루 민원이 많이 들어와서일까 최근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스락 거리던 그 자리에는 푹신한 은행잎이 깔려 있었다. 가로수가 선정되는 데는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한다. 풍토에 적합한 수종이여야 하고, 도시 햇볕과, 지열, 대기오염 등을 잘 견뎌야 하며 넓은 잎으로 녹음을 만들어 주거나 경관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부분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수많은 조건들을 갖추며 도시에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사람들과 공존하는 나무가 있다.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교차로에 서있는 콩배나무이다. 콩배나무 500만 그루는 해마다 대기 오염물질 2000여 톤, 이산화탄소 4만 톤 이상을 제거한다고 한다. 나무의 생명력이 놀랍기 그지없지만 도시의 경관도 빠지지 않는다. 밤이 되면 콩배나무의 꽃들은 달빛을 반사하며 은빛으로 빛난다. 마치 조명을 켠듯한 화려한 모습이 브로드웨이 사인들과 어우러진다. 가로수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춘듯한 이 나무는 도심의 일부가 되기 위해 스스로 진화한다. 지하철 바퀴와 철길이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 자동차 클락션 소리 등 수많은 소음뿐 아니라 진동음도 고스란히 나무에 그대로 전해지는데, 진동을 받아 흔들릴 때마다 뿌리를 더 뻗어 땅을 더 단단하게 움켜쥔다고 한다.
자연의 모습은 정말 위대하다. 힘든 상황에서도 단단히 버티기 위해 뻗어내는 뿌리는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상황이 힘들다고 투덜대고 환경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며 개선을 요구했었던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잘 버티기 위해 땅을 단단히 움켜 쥐였었나?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렸었나?'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도심의 삭막한 풍경 속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고, 제주 공항에 도착해 만나는 야자수는 이국적인 정취로 여행의 시작을 설레게 해 준다. 남부 바닷가와 제주도에 많이 식재되어 있는 먼 나무는 겨울에도 열리는 빨간 열매로 추운 겨울에도 거리를 화려하게 물들인다. 나무는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일상에 함께 할 것이다. 그렇게 우뚝 선채로 때론 따스함, 설렘, 즐거움 그리고 깨달음을 줄 것이다. 매일같이 자연을 만나긴 어렵지만 나무를 통해 자연을 매일 만날 수 있다.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며 잠깐 서있는 시간에 고개를 들어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자연과 함께 하는 오늘 나는 또 이렇게 많은 것을 받고 있구나 생각했다.
오늘, 나무의 노래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