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옆길 카페_33마켓
가을이 되면 찾게 되는 길이 있다.
경복궁 옆길. 이상하게도 낙엽의 물듬을 여기서 한번 보고 나면 한 해가 빛깔 좋게 마무리가 되는 느낌이다.
길게 늘어진 은행나무길을 걷다 보니 여기저기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보였다.
보안 서점에 들러 베스트셀러 책들에 가려져 알아보지 못했던 개성 넘치는 책들을 보고 있자니 다락방 보물상자를 발견한 것처럼 신이 났다. 적당히 눅눅한 날씨에 혼자 길을 걷다 들어온 서점. 이 상황 자체가 또 설렜다.
책을 다 읽고 나가면 또 계획에 없던 듯 마치 홀린 듯 핫플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카페를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번에 연달아 이렇게 신나는 걸 보니 가을을 타는가 보다. 사실 모든 계절을 다 타는 나지만 유독 가을이 좋은 건 몰입이 잘되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도 책 읽기에 적당 온도와 습도, 무겁지 않은 옷차림에 원하는 곳을 누빌 수 있는 자유,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기에 적절한 시기이다. 막상 연말에는 모임도 많고 아이들 겨울방학까지 겹치면 온전히 내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게 가을의 정취와 입꼬리 씰룩이는 시간을 지나 서점을 나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 생각했던 그런 카페가 등장했다. 이건 약간 트루먼쇼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야외 테라스가 잘 꾸며진 카페로 들어섰다. 마치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난 노천카페처럼 프렌치 시크를 온몸에 감고 있는 카페였지만 메인 드링크는 차였다.
차의 발효 정도와 원산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지리산 발효 황차를 선택했다.
다 늦은 밤에 정원에서 즐기는 다도는 또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에 테이블에 앉아 경복궁 돌담을 고즈넉하게 바라보았다. 퇴근 후 친구와의 만남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속삭이며 지나가는 이들, 혼자 앉아 차를 기다리며 멍하니 있는 나를 바라보며 수군 대는 이들도 있었다. 차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이들의 풍경을 구경하는데 앞에 마실 차도 없이 멍하니 길거리에 앉아있으니 나보다도 그들의 구경거리가 된듯했다.
보안 서점에서 책을 보다 나와 걸으며 카페 에 앉는 동안 서점걱정을 하게 되었다. 책을 주고 구경만 하다 나오고 사가는 사람이 없는 거 같던데 하루 매출은 어떻게 될까, 임대료가 비쌀 텐데 건물주가 운영하는 서점인가? 생각을 하던 차에 차가 나왔다.
오목하게 담겨 나온 차 주전자와 보온병이 가지런히 테이블에 놓였다. 혼자서 멍하니 가을밤을 즐기기 위한 준비가 완료된 듯했는데, 이상하게 내 시선을 끈 건 차의 향기도 흔들리는 촛불을 모티브로 만든 듯 한 휴대용 랜턴 조명도 아니었다. 차 주전자와 함께 나온 크리스털 찻잔이었다.
흔히 차를 마시기 위한 기본 세팅은 도기로 된 찻잔세트를 연상하기 마련이었지만 생각지 못한 찻잔의 소재가 나를 당황시켰다.
차 주전자 뚜껑을 열고 향을 음미한 다음 따뜻한 물을 붓고 30초간 기다린 뒤 크리스털 찻잔에 차를 따라보았다. 높이만 조금 높으면 영락없는 위스키 잔이었다.
날이 어둑해져서 인지, 그날 좀 취하고 싶었던 건지, 향을 음미하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위스키와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찻잔을 나도 모르게 옆으로 흔들거리며 마신 지리산 황차는 그날 하루 일과를 응축한 채, 내 손에 쥐어졌다. 가을길을 걷다 보물상자를 발견하고 홀로 앉아 잡다한 생각을 하다 분위기에 취해 히죽거리는 오늘의 썸네일 페이지에 등장할 법한 찻잔!
커피와 맥주는 다 같이 마시면 좋고 차와 위스키는 혼자 마시는 게 좋다 라는 나만의 매뉴얼을 하나 새겨본다.
오늘 하루의 빛깔 좋고 풍만했던 무수한 에피소드를 생각하며 마지막 차 한모금을 마셨다. 캬아-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