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본 영어의 민낯
“Pardon?(뭐라고요)”은 내가 영국에 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Pardon?”은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때 다시 말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국 사람들이 하는 영어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저 말을 정말 많이 했다. 슬프게도 이런 상황이 아닐 때 역시 “Pardo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언제냐 하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상대방의 말을 설사 다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내 머리 안에 있는 말을 도저히 영어로 말 못 하겠을 때 못 알아들은 척했다. 상대가 다시 말해주는 동안 나는 생각할 시간을 더 벌게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해보고는 했다.
중학교 때 BBC 드라마 ‘셜록’ 속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영국식 영어를 들으면서 이런 게 멋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영국 특유의 발음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영어가 훨씬 알아듣기 힘들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미국식 영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영국식 영어는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점도 알아듣기 힘든 데에 조금의 영향은 미칠 것이다. 근데 그래도 같은 영어 아닌가? 아예 못 알아듣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현실은 정말 못 알아들었다. 일단 말이 너무 빠르고, 내가 알던 영어 발음과도 많이 달랐다. 그리고 거의 2~3개의 단어를 뭉쳐서 한 번에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영국은 각 지방별로 사투리도 심하다고 들었다. 특히 말투가 빠르고 내가 더더욱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학생들은 아마 사투리가 심한 곳에서 왔을 거라 추측해 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 영어 공부한 세월이 있는데...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못 알아 들어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갔다.
영어 듣기의 어려움에 이은 두 번째 난관은 말하기이다. 말하는 게 너무 어렵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나는 영어를 말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한국인들끼리는 영어 할 일이 없고, 영어 수업 시간에는 문법 설명을 듣거나 모의고사 문제를 풀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영어 공부한 세월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 말하기를 못 한다.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서는 각 대학교가 요구하는 IELTS 점수를 제출해야 한다. IELTS는 미국의 TOEFL과 비슷한 시험으로 IELTS 역시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총 4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에도 말하기만큼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는데, 인터넷 강의를 보면서 답의 구조를 거의 통으로 외워버렸다. 문제의 상황에 맞춰 조금의 변형만 하면 됐다. 나 스스로도 IELTS를 준비하며 이게 과연 영어 공부일까 싶었다. 영어 공부가 아니라 암기를 했던 거니까. 그럼에도 일단 IELTS 점수를 받아야 했기에 급한 불 먼저 끄자는 생각으로 대강 시험을 봤다.
영국 교환학생을 결국 오게 됐으나, 당시 진정으로 스피킹을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 재앙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질문을 했을 때 물론 전부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알아들었던 건 답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이 굳어버렸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분명히 속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생각을 한참 동안 영어로 바꾸고 있고, 시제와 문장 구조를 생각하기에 바빴다.
마지막 고난은 단어였다. 단순히 해외여행을 온 것이었다면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까지는 필요 없을 것이다. 내가 했던 여행만 되돌아봐도 식당에서 음식 주문할 때나 물건 살 때 말고는 영어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교환학생을 왔기에 영어로 되어있고 심지어 학문적인 내용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내가 듣는 수업은 정치와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한국어로도 잘 모르는 내용을 영어로 듣고 있으니 강의실에서 매번 멍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수업을 다녀와서 유튜브에서 한국어로 된 영상을 찾아 보충수업을 듣는 게 일상이 됐다. 나는 한국어로도 변증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데 Hegelian Dialectic(헤겔의 변증법)이 웬 말인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어를 모르면 영어를 알아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부터는 영국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나의 영어 듣기, 말하기, 단어 실력이 처참하다는 걸 알게 된 후 느낀 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한국의 영어 교육은 완전히 잘못됐다
tvN 예능 ‘문제적 남자’에 미국인 타일러가 출연해 수능 영어 문제를 틀렸던 것을 보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 문제 해설을 해주는 것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영국에 오고 난 후 한국의 영어 교육을 회상해 보니 수능 영어는 영어 실력을 위한 시험이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논리력을 묻는 시험, 나쁘게 말하면 말장난이었다. 수능 영어 공부가 영어 실력 향상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첫 수업을 듣고 나와 충격을 받은 채로 터벅터벅 하교하는데 문득 중학교 때 영어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4 형식 문장에서 처음에 It은 가주어이고 뒤에 나오는 to 이하가 진주어이다...” 그동안 내가 영어 공부에 공들였던 시간이 사기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뼈 빠지게 영어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실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영어의 자세한 문법적 개념은 쓸 데가 없다. 그리고 아마 영국인들도 제대로 모르지 않을까 싶다. 한국어 문법을 잘 안다고 한국어를 잘한다고 할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어를 잘 말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진정한 영어 실력을 갖춘 것이라 생각한다. 영국에 직접 와보니 내가 경험했던 한국의 영어 교육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가지게 됐다.
2. 영어는 끊임없는 노출이 필요하다
모든 언어가 마찬가지겠지만 영어 실력의 향상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인풋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우리 모두가 공부한 기억도 없는 모국어를 잘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엄청난 양의 노출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국에서 자라는 경우 집 안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모국어가 들린다. 그리고 어디를 가도 쓰여있는 글씨는 모국어이다. 그게 쌓여서 언어를 잘하게 되는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에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 처음에 수업을 들을 때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영어에 노출되면서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덕분에 느리지만 매 수업 시간마다 수업 내용을 알아듣는 정도와 토론 수업 때 말하는 빈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한국은 영어를 쓰는 나라가 아니기에 지나가다가 영어를 듣거나 말할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지만 스스로 영어에 노출을 시켜줘야 한다. 영어 노출에 대한 방법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영어 책뿐만 아니라 유튜브,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가 있기에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글로벌한 세상이라서, 일할 때 영어를 쓰기 때문에?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하라고 하니까 했다. 지금 와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정보’를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세상 모든 정보 중 90% 이상이 영어로 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업에서 못 알아들은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어로 된 내용을 접하고 싶어 네이버나 유튜브를 찾아보면 정말 유명한 철학자들 아니면 정보가 없다. 그래서 구글에 가서 영어로 찾아봐야 한다. 구글에 검색하면 엄청난 양의 논문과 관련 기사가 나오는 걸 보고 새삼 놀랐다.
앞서 tvN 예능 '문제적 남자'에 출연했다고 소개한 타일러는 시카고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뒤 한글로 ‘북한’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더니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영어만 할 줄 알았다면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우리에게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언어가 다가온다는 것은 그 모든 정보의 바다가 나에게 온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