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는 '사랑' 그 자체
"하루 중에 가장 많이하는 말이 뭐야?"
"귀여워."
아침 햇살이 들어오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 알람 소리없이 스스로 눈을 뜬 날이 얼마만인가. 의식이 깨어나기도 전에 그 얼굴이 아른거린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 '신뭉'. 2022년 2월 2일에 정식으로 우리 가족이 된 아기강아지 말티푸다.
강아지를 키우고픈 마음에 어린시절부터 강아지를 '대체할 만한' 인형을 끼고 살았다. 지금까지 거쳐간 애착인형만 총 4마리다. 4살 때부터 온 사랑을 퍼부은 '곰돌이', 6살 때부터 각별한 애정을 쏟은 '곰순이'(참고로 곰돌이와 곰순이는 내가 8살 때 결혼을 시켰다. 둘은 굉장히 닮았다), 그리고 7살때부터 11살 때까지 열렬히 좋아했지만 제주도 여행에서 잃어버린 '클리포드', 마지막으로 15살 때부터 지금까지 머리맡에 두고 자는 '뭉뭉이'가 있다. 20대 초반까지의 삶에서 인형에 진심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 강아지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를 강렬히 원했고, 꽤 다양한 이유로 강아지를 키울 수 없던 환경 속에 애정을 쏟은 대상은 '인형'이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가족들에게 제안을 했다. 하지만 너무 강렬하게 원하면 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듯이, '털이 날린다', '가족들이 제때 돌봐줄 수가 없다' 등의 이유로 소망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어느 날, 어머니께서 눈밭을 퐁퐁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강아지 키우자!"
10년이 넘는 고민의 시간 그리고 느닷없는 결정. 상당히 빠른 결단력까지 최고의 콜라보가 이뤄졌다. 생각과 행동의 전환이 이뤄난 것이다. '털이 빠지는 게 걱정이 된다면 최대한 털관리가 잘 되는 강아지를 데려오면 된다. 가족들이 제때 돌봐줄 수 없던 한계는 어머니의 재택근무로 인해 해결된다.' 분명히 우리는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렇게 최종 결정이 난 후 다음날, 바로 뭉이를 데려왔다. 보들보들하고 복실복실한 털, 귀여운 얼굴과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억울한(?) 표정을 보고 단번에 깨달았다. '아, 이 아이는 우리 애다!'
운명처럼 우리가족이 된 '신뭉'. 신씨의 성을 따르고, 뭉뭉이처럼 생긴 깜찍한 외모를 바탕으로 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뭉이는 7살 차이나는 내 여동생이 태어난지 16년만에 찾아온 새 가족이다. 21년 11월 14일에 태어나 아직 3개월이 채 안 된 뭉이.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제 사람들 손을 거치니 가족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벌떡 일어서서 반기곤 한다.
뭉이는 아주 활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장난감을 주면 혼자서도 잘 가지고 논다. 사진에서 보이는 강아지 인형은 앞서 언급한 나의 애착인형 '뭉뭉이'다. 강아지를 못 키웠기에 대신 예뻐한 인형인데, 이제는 인형같은 강아지가 그 인형을 "앙!" 물고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고 있다. 만감이 교차한다. 감회가 새롭다. 어쩌면 내 애착인형의 존재 이유는 뭉뭉이의 장난감이 되기 위함이었을까.
15일동안은 뭉이가 울타리 안에서 적응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기이므로 집 안에서 분리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낑낑댈 때마다 가족들이 안아주거나 과잉반응하면 나중에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속 끊임없이 안아주거나 반응을 하면, 결국 강아지가 혼자 있는 것조차 어려워해서 정서불안 등의 문제를 경험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섬세한 배려와 '올바른' 사랑이 필요하다.
강아지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선물해준다. 뭉이를 보면 그저 '사랑한다'는 감정만이 떠오른다.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부터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다. 이 작고 여린 아기강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사랑을 하면 끊임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지금껏 가족, 연인, 친구에게 사랑을 표현한 적은 많았어도 무한적으로 '주는'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나? 단언컨대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뭉이를 만나고 나서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주고만 싶은 사랑의 감정이 솟아오른다. 이미 뭉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기에, 수치로 정량화할 수 없는 그 기쁘고 벅찬 '채워짐'을 '주는 사랑'으로 다시 환원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불현듯 어릴 적 가족들이 사주신 장난감을 주위에 한가득 두고 놀았던 게 떠올랐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애견 용품 코너로 쪼르르 달려가 신뭉을 위한 장난감을 고르는 날 발견한다. 어떤 장난감을 가장 좋아할까, 어떤 재질이 가장 안전할까를 유심히 살펴본다. 다른 존재를 위해 즐거움과 행복을 주고 싶은 마음은 되려 스스로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그 엄청난 사랑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자 뭉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