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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범 Apr 29. 2024

군산

또 다른 이야기 4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끈질기게 공부를 해 법대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몇 차례 봤지만 끝내 합격을 하지 못하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기에 9급 공무원이 되어 동사무소에 만년 계장으로 살아왔다.     

그날 그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     


아버지는 낮엔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포목 배달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기에 늘 피곤에 절어 있었다.     

피곤에 절은 모습이지만 키도 크고 늘 밝은 모습에 청년이 고시 공부를 한다는 소문에 시장 상인들 모두가 아버지를 좋아해 여기저기서 사위 삼자고 포목점 주인들이 아버지에게 말들을 건넸지만 아버지는 고아인 자신의 처지에 지금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늘 농으로 넘겨 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달을 나간 어느 미싱 공장에서 갑자기 현기증으로 주저앉았는데 누군가 손수건을 건네기에 쳐다봤더니 어느 아가씨가 “코피 나요”하며 울듯한 모습으로 서있었다고 한다.     

하루 일이 끝나고 산동네 쪽방으로 돌아와 피곤한 몸을 추슬러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 들었으나 그날은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아가씨의 얼굴이 예쁘긴 했지만 예쁜 얼굴에 혹해서 공부를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게 살아오지를 않았고 굳은 뜻이 있었기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데 그날은 마치 뭐에 홀린 듯 자꾸 그 아가씨의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 다음 날 잠시 한가한 참에 짬을 내어 깨끗하게 빨아서 곱게 접은 손수건을 들고 그 아가씨를 찾아가 말없이 손수건을 전해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긴 채 돌아서는데     

“잠깐만요” 하는 아가씨의 말에 돌아서니 “밥 먹었어요?     

“배고픈데 우리 밥 먹으러 갈래요”하며 앞서 걷길래 따라 가 국밥집에서 순댓국을 한 그릇 먹는 동안  

"가끔 봤는데 안쓰러워 보였다"부터 시작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둘이 만나기 시작해 그해 가을 아버님과 어머님 둘이는 결혼식도 없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 해 엄마의 부모님들이 강원도에서 올라와 산동네 좁은 마당에 초례청을 차리고 조촐한 혼인식을 올린 후 아버지께 한 엄마의 첫마디가 “그날 난 당신이 꼭 올 줄 알고 무작정 하루 쉰다고 이야기하고 아침부터 일도 안 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라며 울었다고 했다.     

그 시절엔 속칭 공순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쉽게 일을 빠지고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만 워낙 솜씨가 좋고 예쁘장해서 귀여움을 받던 미싱공이라 사장이 특별히 하루 빼준 것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엄마는 운명처럼 만나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했다.     

아버지는 고시를 포기하고 동직원으로 살아가는 동안 가끔 남몰래 한숨을 쉬곤 했지만 늘 웃는 얼굴로

해 질 녘이면 산동네 성벽을 따라 집으로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복덕방 김씨 아저씨가 노인 하나를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닐 때

그 노인과 마주친 아버지는 갑자기 멍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다 집으로 돌아와

벽에 붙어 있던 할아버지의 사진 액자를 내려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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