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야기 5
그 뒤 몇 달이 지난 후 그 노인과 그 노인의 서른쯤이나 된 노인의 아들이 동네 집집마다 다니며 월세를 받아가기 시작했고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과 아들에게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의식적으로 피했고 동네 사람들하고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아들이 혼자 자가용을 동네 초입에 세우고 월세를 걷으러 다니는데 그는 속칭 제비처럼 빤지르해 동네 여자들의 수다거리에 한 축을 차지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장충단 쪽에 출장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그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날 밤 대판 부부싸움을 하고 어머니는 그날로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네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단다.
너는 큰 뜻을 세워 네 나라를 위해 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네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거야”
그 나쁜 친일파 놈 네 할아버지를 그렇게 죽이고 또 나를 죽이는구나”
너는 절대 할아버지처럼, 나처럼 살지 마라! 절대 이렇게 살지 마라!”
그렇게 다짐을 받은 뒤 아버지는 말을 잃고 늘 술에 취해 성벽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는 벚꽃을 좋아했다.
늘 벛꽃이 피어나는 봄날이면 벚꽃 그늘 아래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취한 눈을 들어 파란 하늘 아래 피어난 벚꽃을 올려 보곤 했다.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지만 벚꽃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벚꽃은 왜놈들의 꽃이 아니다.
왜놈들이 여기저기 벚꽃들을 많이 심어 놓았지만 실지로는 우리나라에 원래부터 있던 꽃이여”산벚나무. 황벚나무. 이스라지. 귀룽나무. 왕벚나무·수양벚나무 종류도 참 많고 활 만드는데도 쓰고 쓰임새도 참 많았지“
”산벛나무하고 왕벛나무를 어떻게 구분하냐하면 눈망울 초롱한 애기같은 벚꽃이 산벛이야“
목련꽃은 아주 먼 북방으로 군역간 지아비를 기다리는 새색시 뒷목같고 벚꽃은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저녁짓는 아낙네 입매같아 보인다”
기억 속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한 날엔 언제나 성곽에 올라가 있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성벽 아래 돌 틈에 제비꽃이 필 무렵 술에 취한 아버지는 성벽 너머로 끝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