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영원의 문에서

줄리안 슈나벨 감독. 고흐, 영원의 문에서

by 백승권

기억나는 거라곤 어둠과 불안뿐이거든.


내 이름을 기억하는 데도 몇 분이 걸려.


그림이라기보다는 조각 같아.


난 평생을 혼자 보냈어. 방 안에서.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


소재와 자연의 모든 것이

열광적으로 뒤틀려 있다.


터널에서 태어난 여자도 알았었지.

태어난 12년 동안 해를 보지도 못했대요.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아니 선택적으로 인지한다가 더 가까운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축적된 관점을 통해 노출된 사물, 인물 등의 대상으로 시선과 동선이 옮겨지고 반응하거나 기억으로 저장시킨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해석과 왜곡, 편집과 오해, 분류와 상실이 발생한다. 개인의 경험이 글과 그림으로 표현되었을 때 원본과 결과물은 완전히 다르다. (사진과 똑같이 그리는 회화처럼) 비슷할수록 더 많은 대중의 감탄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완전히 같아 보인다고 해도 둘은 완전히 다르다. 대상에서 대중으로, 표현의 결과물을 통해 옮기는 일. 의미와 가치는 믿음을 지닌 자들에게 발견된다. 자연을 그리는 화가는 어쩌면 자연의 언어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번역하는 직업, 고흐는 자연이 선사하는 무한의 풍경 앞에서 한없이 자유로워 붓을 놓지 못했고 인간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갇히고 묶이며 고통과 외로움, 정신병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도 그에게 화가라는 업을 강요하지 않았고 고흐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형틀에 평생을 묶여 슬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다. 좋아서 그렸고 그려서 슬펐다. 그는 붓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정신의 방향을 조절하지 못해 친구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귀를 잘라 편지로 감싸고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가해자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완전하지 않았고 극소수의 들어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들조차 고흐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고흐의 처지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연민이 있어서 고흐는 아주 겨우 최소한의 사람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었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 자체였다. 시선과 생각, 지인과 거리가 불안하고 흔들리는 붓놀림 속에서 색과 선, 면과 질감들 속에 담겨 영원히 말하고 있었다. 사는 내내 힘겨웠던 화가는 죽어서 미술 시장의 신화가 되었다. 만인의 아이콘이 되었고 지금은 시장 바닥부터 건물 옥상, 대형 갤러리와 경매장부터 반지하 벽과 휴대폰 케이스까지 그의 그림이 없는 곳이 없다. 사후의 가치로 현세의 인물을 평가한들 그의 어려웠던 삶은 보상받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고흐(윌렘 데포)의 의지가 영원에 닿아있었다고 말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자신의 존재와 그림을 알아봐 주는 이를 울먹거리며 찾아 헤맸던 앙상한 골격의 네덜란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영원히 남을 유산이 될 거라 믿었다. 그 믿음조차 그의 수명을 더 늘릴 수는 없었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그의 그림들은 영원한 젊음을 획득했다. 예술가가 자신의 전부를 예술(결과물과 세계)에 위탁한다는 건 그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열정을 쏟는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고흐를 버려야 했다. 우리가 보는 고흐의 작품들 속에 인간으로서의 고흐는 없다. (자신의 작품과 가치를 유일하게 인정해준 화가 중 하나로 그려지는) 고갱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귀를 잘랐다는 일화가 가장 처절했다. 인정과 관심이 극심하게 결핍된 상황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를 만났지만 고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그를 가까이 두고 더 이야기하고 자신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었지만 고갱은 떠나야 했다. 타인의 현실과 스스로의 욕망이 부조화를 이룰 때 고흐의 불안과 공포는 신체 훼손으로 이어졌다. 고난이 예술가의 숙명이라면 인류에게 예술이란 거대한 착취 시스템 아닐까. 영원은 허상이다. 고흐의 그림 속엔 절망과 죽음이 서려있다.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아서 값을 지불하며 대리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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