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가랜드 감독. 멘
싸우는 연인. 지긋지긋한 같은 패턴의 대화. 이어지는 분노, 고성, 짜증, 흥분. 남성의 주먹이 여성의 얼굴을 향하고 가격 당한 여성은 쓰러진다. 여성은 남성을 내쫓는다. 이성적인 대화는 처음부터 없었고 이제 실질적인 관계가 종결되어야 하는 상황.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공간. 유리창 안에 서 있는 여성의 눈앞에 익숙한 외형의 오브제가 추락한다. 눈을 마주친다. 방금 전까지 나와 싸우고 나를 때렸던 인간이 고층 건물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살? 타살? 내려가 확인한다. 그가 맞다. 그는 죽었다. 그는 더 이상 여성의 삶에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의 죽음 이후 하퍼는 작은 여행을 떠난다. 잠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온전히 혼자 있어야 하는 공간. 어느 먼 외곽의 넓고 고풍스러운 집을 잠시 빌리기로 한다. 집주인 남성(로리 키니어)은 이상한 농담을 즐기는 조금 괴짜 같았다. 익숙한 공간에서 연인의 죽음을 경험한 하퍼는 낯선 공간에서 혼자와 마주한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떠나지 않는 이미지, 그때의 대화들과 과정... 희미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당장은 너무 깊숙이 오장육부를 파괴하듯 스멀거리고 있었다. 떼어내고 떨쳐내야 했다. 주변의 숲을 거닌다. 한없이 한없이 걷는다. 멀리 누군가 있었다.
하퍼는 위협을 느낀다. 방향을 정하지 않고 도망친다.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완전히 벌거벗은 남성이었다. 집주인 남성과 같은 얼굴을 한. 경찰에 신고한다. 집주인 남성과 같은 얼굴의 경찰이 온다. 주변 교회로 간다. 집주인 남성과 같은 얼굴의 소년이 하퍼에게 욕을 한다. 집주인 남성과 같은 얼굴의 종교인이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냐며 개소리를 하며 접근한다. 하퍼는 근처 술집에 가고 거기서 모든 테이블의 남성들과 술집 주인은 집주인 남성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하퍼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다만 하퍼는 그들의 폭력성이 자신을 해치는 걸 그냥 둘 수 없었다. 벌거벗인 괴물이 다시 하퍼를 습격한다. 하퍼는 칼을 든다. 그 칼은 괴물의 팔을 쪼개 버린다.
벌거벗인 성인 남성의 외형을 지녔던 괴물은 하퍼 앞에서 출산을 한다. 괴물의 몸에서 같은 얼굴의 커다란 남성이 점액질에 뒤덮여 나온다. 그 피조물의 배는 처음부터 부풀어 있었고 다시 출산을 한다. 같은 얼굴의 커다란 남성이 점액질에 뒤덮여 나온다.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끝내 마지막 남성 피조물이 하퍼 앞에 나타난다. 제임스였다. 하퍼(제시 버클리)의 눈앞에서 떨어져 죽었던 제임스(파파 에시에두).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눈다. 먼 곳에서 하퍼를 걱정하는 여성이 도착한다.
남편의 자살을 겪은 여성의 환상인가. 멀리 도망친 공간조차 남성의 소유물인 세상. 경찰, 종교인, 술집, 범죄자 모두가 (동일한) 남성인 세계. 하지만 하퍼는 과거의 공포영화에서 익숙하게 등장했던 연약한 여성이 아니었다. 하퍼는 모든 상황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매너를 가장한 미소를 쉽게 보이지 않고 같잖은 개소리에 바로 짜증으로 응수하며 폭력에 맞서 기꺼이 무기를 휘두른다.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렇게 남성의 세계를 부수고 악몽의 처음과 마주한다. 마치 죽은 제임스의 저주가 살아있는 하퍼의 의식과 무의식을 겁박하고 지배하려 드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죽어서도 여성을 잠식하려는 폭력적인 남성과 거기에 맞서는 이야기.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라고 협박하는 남성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화염방사기를 빌려오고 싶은 장면이 많았다. 도망갈 곳은 없고 피하고 싶은 대상은 너무 많은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