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감독. 서울의 봄
이태신(정우성)은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이성민)의 수도경비사령관 제안을 여러 번 거절했다. 정승화가 전두광(황정민) 패거리에 의해 납치되었을 때 이태신은 격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사람과 자신이 목숨 바쳐 섬기는 국가가 동시에 위협받고 있었다. 탱크를 몰고 가 전두광 패거리의 대가리를 깔아뭉개 부수고 싶었다. 국가를 구할 수 있다면 각오가 아니라 실행할 수 있었다. 이태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존재하는 사람. 군인 정신을 지키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태신에겐 명예로운 삶이었다. 그래서 가장 충직하게 따르는 최측근의 절실한 만류에도 휘하의 모든 병들에게 반란군 진압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불리하고 유리한 게 중요하지 않았다. 후퇴는 전투의 주요 전술 중 하나지만 지금 정황에서 후퇴는 항복이었고 곧 국가 전복이었다. 전두광 패거리에게 나라를 내어주는 선택이자 결정이었다. 이태신은 자신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편 모두의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야 했다. 집에서 평생을 언약한 아내가 새벽까지 기다리는 일은 가장 후순위였다. 이태신은 명령을 내리기 전 이미 자신이 돌아갈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상관과 휘하 부대원 모두의 목숨을 걱정하는 총구 앞에서 이태신은 망설이지 않는다. 이태신은 역사의 맨 앞에 있었다. 적군은 너희는 이미 졌다고 말하고 있었고 아군은 우리는 이미 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태신은 혼자였다.
전두광은 패거리를 모아 반란을 주도한다. 그의 패거리들 중 대부분은 그의 계획에 동의하며 성공할 경우 이익을 나누는 자들이었고 나머지 병들은 반란을 위해 동원되는 말이었다. 전두광과 그의 패거리들은 군의 수뇌부였고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실제 전시 상황의 주요 자원이었다. 국토수호를 위해 총검술을 익히고 소리 없이 적을 죽이고 포를 쏘는 법을 익힌 자들이었다. 이들 중엔 인간 병기도 있었다. 명령 하나에 병기와 살기로 적의 신체를 분해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주적을 항상 북한으로 교육받았고 최전방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전두광 패거리들이 지휘하고 있었고 이들이 총과 칼과 포의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북한군이 아닌 남한군으로. 남한군과 남한군이 대치하는 상황이 자행되고 있었다. 반란군과 진압군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각인된 상식 체계가 붕괴되고 있었다. 명령과 복종만으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새로운 전시 상황이 생성되고 과녁이 아군으로 돌변했다. 전두광 휘하의 모든 군인들은 이태신을 중심으로 한 모든 군인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반란군의 앞을 막은 진압군의 몸통이 목표물이 되어 난사되는 총탄으로 찢기고 있었다. 이태신은 최후의 무력 수단을 동원했지만 모든 통신이 장악되고 부대원의 추가 희생을 막기 위해 군간부의 절대다수가 반란군에게 동조하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그의 명령은 작동하지 않았다. 전두광 패거리의 군사 반란은 성공했고 진압은 실패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왜 1996년 당시 법원이 전두환에게 사형을 판결했는지 알게 되었다.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해졌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반란 세력이 판결 및 확정받은 죄목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이었다.
*판결 자료 출처
https://www.law.go.kr/%ED%8C%90%EB%A1%80/%2896%EB%85%B8189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