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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pr 22. 2024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 노량: 죽음의 바다

김한민 감독. 노량: 죽음의 바다

복수심만큼 강력한 공감대를 일으키는 감정은 드물다. 살인을 살인으로 갚는 인간의 형벌 제도만 봐도 그렇다. 작용과 반작용, 복수는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거래에 가깝다. 양쪽의 무게를 같게 하는 것. 한쪽이 부당하게 빼앗겼다면 빼앗은 자의 몫도 동일하게 빼앗는 것.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혀에는 혀, 칼에는 칼, 총에는 총, 피에는 피... 이순신은 전쟁 중 아들을 잃는다. 왜군의 습격에 의한 전사였다. 그가 겪었을 절망과 상실, 죄책감을 짐작하지 못한다. 이순신이 내 상상력 안에서 예상 가능한 인물이라면 그는 모든 왜군의 자녀를 도륙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녀의 피를 자녀의 피로 되돌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노량은 마지막 기회였다. 왜군들도 누군가의 자식 또는 아비였을 테니. 단 하나도 남김없이 죽일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값을 치를 수 있는 셈이었다. 아들의 복수뿐이 아니었다. 이전의 전투 중에 먼저 피를 쏟은 수많은 장수들이 이순신의 안구와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다. 단 한 명의 왜구도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 한 명이 돌아와 조선의 백성을 해친다면 이순신은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를 놓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때가 오고 있었다. 어둠과 불빛이 적막한 바다 위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런 복수심을 가진 자는 이순신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순신 휘하의 모든 병사들도 각자의 복수심과 투지로 휩싸여 있었다. 이순신의 적들은 어떠한가. 패전의 원인 중심에 가공할 명장 이순신이 있었다. 그 이순신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었고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존심을 넘어서지 못한 자신의 능력이 그저 참담했다. 같은 국기를 펄럭이는 아군들끼리 모여 이순신을 처단해야 했다. 이끄는 병사들을 모조리 죽음에 몰아넣더라도 상관없었다. 늘 그래 왔으니까. 이순신의 조선을 짓밟은 자들이 이런 자들이었다. 이순신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 이런 자들이었다.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저들에게 길을 내어주면 다시 돌아와 더 많은 조선인들의 아들을 죽일 거라는 것을. 이순신은 모조리 베어야 했다. 지금까지 저들로 인해 숨을 거둔 모든 조선인들을 대신한 복수를 감행해야 했다. 표면적으로 개인적 원한에 의한 광기로 보여도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순신은 절대다수의 이해를 바라는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판단 위에는 조선과 조선인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를 위해 자신을 처절한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후한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조선땅에 배를 타고 와서 칼을 휘두른 어떤 왜군도 산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꿈을 꿀 때마다 죽은 아들이 보였다. 이순신에게 자신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끝날 때까지만 기능을 다해야 했다. 살아있는 이유는 이것 하나였다.


전투는 투지 하나로 기울어지는 심리 게임이 아니었다. 검은 바다가 시체와 핏물로 가득 찰 때까지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노량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에서 2만여 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그들 (각자)의 이미지는 어떤 사진과 그림으로도 후세로 남겨져 있지 않다. 서로 다른 국가에서 태어나 살상 훈련을 받고서 처음 보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야 했다. 팔과 목이 잘리고 바다에 내던져지고 오장육부가 잘리고 튀어나오고 숨이 다 끊어지지 못한 자는 울부짖고 있었다. 이순신에겐 익숙한 지옥이었지만 도저히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아비규환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면 바로 전운이 기울 수 있었다. 이순신은 피와 폭약과 바람과 해수가 뒤엉킨 지옥 속에서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로 조명연합 모든 병사의 등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적의 공격으로 숨을 거둔다. 이순신은 끝을 보았을까. 그는 복수를 집행하던 중에 사망했다. 모든 왜군이 죽는 것을 확인하지 못해 얼마나 원통했을까. 완전한 승리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지 못해 얼마나 원통했을까. 노량에서 이순신은 죽었고 조선군은 승리했다.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이순신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녔던 한 시대의 상징이자 전부였다. 조선은 이순신에게 국가적인 복수의 대리업무를 떠맡기고 어떻게 하나 구경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같은 배를 탄 부하장수들만 신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이순신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모든 순간 갈등해야 했다. 애국심과 전우애, 리더십과 연민이 뒤섞여 아무리 적의 몸통을 베고 찔러도 끝을 알 수 없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 속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살육을 모든 배가 멈출 때까지 이어가야 했다. 이순신 장군은 현재 동상으로 만들어져 광화문 앞에 세워져 있다. 그가 살리려 했던 조선의 후손들과 그가 모조리 침몰시키려 했던 일본의 후손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 자신의 죽음마저 숨겼던 한 지휘자의 절박했던 꿈은 이렇게 실현되었다. 그는 이름 없이 죽어간 장수들의 현신으로서 여전히 흔들리는 국가를 위해 거대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불멸의 이미지를 통해 그의 복수는 앞으로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상실은 되돌릴 수 없고 적들은 계속 밀려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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