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 감독. 바비
우린 생식기 없다고
다섯 살 이후론
안 갖고 놀았거든요
넌 페미니즘 운동을 50년 퇴보시켰고
여자애들의 자존감을 짓밟고
소비를 부추겨 지구를 파괴한다고
제작진 들으세요 이런 대사 시킬 거면
마고 로비 캐스팅하지 마세요
지금의 널 만들었다 믿었던 모든 게
네가 아닌지도 몰라
난 양쪽 가슴 절개하고
탈세 문제 있는 키 작은 할머니야
그레타 거윅과 마고 로비가 완성한 인어공주의 2023년 버전. 유창하게 말을 하고 자각을 멈추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상황을 개척하고 돌파하며 과거 인어공주가 지녔던 거의 모든 면의 한계를 초월한다. 무엇보다 바비는 인형 마고 로비에서 (인어공주가 그토록 염원했던) 인간 마고 로비가 된다. 인간 마고 로비는 (그를 처음 보고 비웃었던) 지구상의 어떤 인간보다 우월하게 느껴진다. 인어 - 한계를 가진 인간 - 인간을 닮은 인형 - 인간 마고 로비 순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 진화의 의미는 우월이 아닌 적응에 가깝지만) 평균 인류가 추앙하는 외형적인 면만 본다면 진화의 완성형이다. 백인 금발 셀럽 마고 로비가 인형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은 가는 곳마다 실패와 헛소동이 난무하지만 지극히 우스꽝스럽게 연출된 퍼포먼스로 떳떳한 허구로 점철된다. 어떤 방해도 실질적인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 마고 로비가 무엇을 원하든 자신이 원하던 결말로 무사히 도착하게 될 거라는 데는 모든 의심을 지우게 된다. (비중 있는 조연은 켄의 소원이지만) 켄이 조커가 되어 바비의 목숨을 노리고 격투를 벌이며 끝내 바비가 켄(라이언 고슬링)의 심장을 찌르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비중 있는 조연은 켄의 소원이지만) 켄과 바비가 (블루 발렌타인처럼) 씁쓸한 중장년의 부부가 되어 쇠락한 열정과 침전된 연민으로 주택 담보 대출과 대학 등록금을 가지고 싸우는 일도 없다. 마고 로비는 수많은 조연들을 만나고 수많은 에피소드를 겪은 후 수많은 대사들을 하다가 해피엔딩에 안착한다. 마고 로비는 자신이 (연기하는 대상이) 바비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어 보이지만 마고 로비를 닮은 바비로 보이거나 바비를 연기하는 바비로 보이지 않는다. 마고 로비(바비)는 마고 로비로 보인다. 핑크 컬러 패션을 휘감은 백인 금발 셀럽 마고 로비로 보인다. 아이, 토냐의 마고 로비를 기대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마고 로비는 바비가 기존에 지녔던 지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백인 기득권의 외형을 지닌 여성이 인류 전체의 여성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거대한 유리병 안에 갇힌다. 백인 여성 바비는 (멍청하고 무식하고 아둔한) 백인 남성 켄이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며 나아간다. 여성이 아닌 백인 계급의 이미지가 형성한 벽에 갇힌다. 마고 로비는 바비가 되어 원하던 목표를 쟁취하지만 뒤를 쫓으며 하염없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주성치 개그를 하는 (킬빌의) 크레이지 88 같은 악당들 때문인지 어떤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상적으로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결과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으니) 마고 로비의 성취에는 공감대나 안도감이 필요 없어 보인다. 부르주아가 리드하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처럼 보인다. 성별이 아닌 인종이 방해한다. 모든 소녀들을 향한 페미니즘 메시지를. 하지만 어떤 소녀들에게 마고 로비의 혁명적 움직임은 상자 속 도구적 인형이 아닌 현실의 주체적 인간으로 나아가려는 여성 운동을 상징하는 위대한 판타지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판타지 장르가 문제였던 것 같다. 최소한 바비가 켄을 교제 살인으로 보내고 (보수 남성 세계관의 중심, 거악의 상징인) 마텔 대표(윌 페럴)를 찾아가 효수하는 엔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웨스트월드의 돌로레스를 기대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