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Jun 20. 2024

1조 4천억 달러를 대출한, 어느 남자의 완전한 삶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어느 남자의 완전한 삶

서술의 대상이 나와 완전히 다르다고 여겨지면 오히려 수월하다. 공감대는 종종 브레이크라서. 이 캐릭터를 비난하는 것이 자신을 비난하는 일은 아닐까. 그래서 <어느 남자의 완전한 삶>의 찰리 크로커(제프 다니엘스, 이하 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롭다. 그는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다. 그는 그저 죽어가는 남자일 뿐이다. 젊은 날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풋볼 선수 그리고 지금은 재혼한 재벌, 찰리는 1조 4천억 달러(*도널드 트럼프 재임 시절 승인한 2020 회계연도 예산안과 동일한 금액이다)의 채무를 조속히 상환하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이 정도 규모의 대출은 긴밀한 상호 조약 안에 협약되고 진행되겠지만 찰리는 은행 담당자의 인내심을 연장할 만큼 평판 관리를 잘한 인물이 아니다. 찰리는 평생 찰리 답게 살았고 수많은 적을 만들며 부를 축적했으며 그렇게 연결된 관계들이 그와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채무 상환 독촉은 오랫동안 쌓아온 (인간의 유한한 삶을 비유하면 모래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성에 마침내 도달한 파도의 시작점이었다. 가시적 균열이 시작된 건 자산뿐이 아니었다. 찰리는 삐걱거리는 무릎을 수술로 갈아 끼운다. 최대한 빠른 재활을 위해 리모컨으로 컨트롤되는 로봇기술이 삽입된다. 그는 자신의 건재를 빠르게 알려야 했다. 거대한 사냥터가 있는 별장, 초음속 비행기, 수십 년 걸려 축조한 초대형 빌딩까지 모조리 빼앗길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에 선 그의 입장에서는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안 그래도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손아귀로 움켜쥐는 일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찰리는 남들처럼 노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만 그는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재벌 지인을 모셔와 도움을 요청하지만 지독하게 무례한 자기 방식 대로였다. (은행의 채무 상환 요청을 멈추기 위한) 정치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전 부인(다이앤 레인)의 친구(루시 리우)를 협박하는 방식도 야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오면서 자신의 적들을 처리한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한 방식으로 문제를 돌파한 방식 그대로 현재의 모든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준 자들을 챙기고 보살피는 일은 잊지 않았지만 자신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이들은 벌레처럼 부르고 다루고 있었다. 피아가 명확했고 따라오는 결과도 극단적이었다. 찰리에게 인격과 명예, 자존감이 짓밟혔던 누군가 그를 증오하다 못해 존경하고 있었다. 찰리 회사의 주거래 은행 대출 담당자 레이몬드(톰 펠프리)는 이번 생에 찰리처럼 될 수 없다면 찰리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겠다는 야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뒤틀린 열등감과 비뚤어진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성욕으로 분출하는 자였고 법적인 처벌로도 나아질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이길 수 없다면 파괴하겠다는 욕망으로 찰리의 삶에 불나방처럼 덤벼들다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 <어느 남자의 완전한 삶>의 찰리는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경제적 파산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시적 외부 행사에 참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생물학적인 시한부도 아니었다. 찰리는 그저 지금까지 누려오던 것들이 조금 축소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적인 상황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마저도 아들에게 (만큼은) 잠시나마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도덕적 번민 앞에서 포기한다. 그는 남은 삶은 조금 덜 가져도 될 만큼 그동안의 삶 동안 충분히 누려온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자신의 방식을 남들도 좋아해 줄 거라는 독단적인 행태가 있었지만 그건 늙은 재벌 백인 남성만의 특이점은 아니니까. 찰리는 갑작스러운 최후마저 일부에게 합리적인 애도를 획득할 것이다. 자기 아들의 엄마의 애인을 죽이려 들던 정당한 분노 표출로. 찰리는 잃은 게 없어 보였다. 완전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 평범해 보인다. 극단적 부유함을 누리는 자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면모는 기묘한 실망감을 안겨준다. 어딘가 사이코패스적인 면모가 있을 거라고 여겨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때. 하지만 세상 그 누구도 찰리 같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어려울 때. (그런 부류가 있다면) 나 같은 이들은 영원히 깰 수 없는 유리벽 안에서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뭔가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어둠이 있었겠지...라고 짐작하는 것조차 우스워지게 만든다. 그래서 찰리의 세계로 건너갈 수 없었다. 감옥에 갇혀 죽을 뻔하다가 겨우 풀려난 흑인 남성(존 마이클 힐)이라면 모를까. 여기까지 쓰다가 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찰리 캐릭터가 도널드 트럼프에서 모티브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게 맞다면 아마도 트럼프 자체보다는 트럼프(를 선망하는) 지지자들을 비웃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찰리는 비교적 온순하고 레이몬드는 완전히 미쳤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